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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문 모서리에 맺힌 햇빛골판지 2013. 10. 13. 00:34
내 원룸 화장실에 문을 열고 서서 바라보면 남향으로 난 큰 방 창문 너머로
맞은편 빌라 주인이 심어놓은 것으로 보이는 감나무가 보인다.
이 감나무는 그 자체로 내게 계절을 알려주는 계절력이다.
감나무에 달린 잎사귀의 무성한 정도며 열매의 크기와 빛깔 따위를 대충만 봐도
어느 계절이 지금 머물고 있는지, 혹은 지나가려 하는지가 얼추 보인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같은 건물이지만 층과 방향이 다른 방에 살아서
기껏해야 출퇴근 전철 안의 옷차림 정도로만 계절을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계절을 느낀다.
도시에서도, 나같은 둔치조차도, 주변 사물로부터 자연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다. 퇴사 1년 만의 변화다.
오늘도 문득 시선 끝에서 밝은 빛이 느껴져 주위를 둘러보니
열어젖힌 화장실 문 아래쪽 모서리에 햇살이 손바닥만하게 맺혀 있었다.
순간, 그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그 당연한 것이
내 시선을 또 붙들어매고는 한동안 놓아주지 않았다.
저 햇빛은 분명, 지구와 태양 사이가 몇억? 몇십억 킬로미터인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 어마어마한 거리를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쉼없이 달려와
대지와 바다 중 대지에, 그 중에서도 하필이면 한반도의 서울에,
거기서도 관악구 행운동 달동네 마을의 좁다란 원룸건물 3층 한켠에 자리잡은
한뼘짜리 내 방,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초라한 곳,
화장실 문 구석진 자리에 따스한 빛을 뿌리고 있다는
그 사실이 이상하게 나를 전율케 하고 벅차오르게 했다.
잠시 후 주위를 다시 둘러보니 빛은
도무지 어떻게 비집고 들어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구석진 곳,
이를 테면 엎어지지 않아도 코 닿을 정도로 옆집과 가까이 이마를 맞댄
내방 화장실의 먼지 낀 창틀위에도 넉넉히 한 줌 뿌려져 있었고
거울에 반사되어 방 안 구석, 원래 빛이 비칠 수 없는 벽에도 희미하게 흩어져 있었다.
빛이 가득하다는 것,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감싸주고 있는 것, 같다.
유치한 건가.
싸구려 감상 같은 건가.
정서의 노화일까.
그도 아니면 그냥 '오버'일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런 종류의 어떤 가슴 가득함을 요즘 종종 느낀다는 것이다.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 속에 태양이 가득 담겨 있다.
그런데 그런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방 화장실 문 가장자리에도, 태양은 있다.
따스함으로 가득한 시선을 담고 엄청난 거리를 달려와 거기에 맺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