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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해와 피해의 기억
    골판지 2007. 7. 16. 00:28

    어제(14일) '한일 연대 21'이 주최하는 심포지엄에 다녀왔다.

    두분의 지도 선생님께서 통역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리고

    끝나면 뒷풀이도 있다고

    그러니까 되도록이면 참석하라는 선생님 말씀에 따라..

    심포지엄은 광화문의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이날의 주제이자 타이틀은 '가해와 피해의 기억을 넘어서'

    부제는 '<요코이야기> 파문을 계기로' 였다.

    한국 일본 얘기가 나오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가해와 피해. 그 기억의 왜곡과

    그 왜곡을 가능케 하는 메커니즘 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오전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

    첫 두 시간은 한국인 두 분의 발제가 있었고

    점심식사 후부터 두 시간 동안에는 일본인 두 분의 발제가 있었다.

    그리고나서는 다른 여러 지정 질문자와

    청중들의 질의에 대한

    발제자의 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청중 가운데에는 기자인 듯한 사람, 학부생 혹은 대학원생인 듯한 사람

    각계 연구자인 듯한 사람 등...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므로

    '듯한' 사람으로 표현하기는 하지만..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고.

    나와 우리과 동기들도 그 중 일원으로서 참석했다.

    두 분 선생님께서는 홀 왼편에 설치된 통역부스에서

    준비된 원고를 읽으시다가, 혹은동시통역을 하시다가 하며

    보이지 않게, 그러나 분주히

    회의 진행을 뒤에서 이끌어가고 계셨다.

    의자만 놓여 있을 뿐 책상 따위가 따로 있지 않았기에

    청중으로서 장시간 발표를 듣고 있기가 수월치 않았지만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홀안의 분위기는 자못 진지했다.

    홀안에 들어가기 전에 제공된 통역기로

    한 귀로는 발표자의 한국어(혹은 일본어)를 들으면서

    나머지 한 귀로는 이어폰을 통해 일본어통역(혹은 한국어통역)을 동시에 들었다.

    오랜 시간 탓인지 아니면 소리의 간섭 때문인지

    집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동문서답식의 의견교환이 간혹 있기는 했어도 대체로 진행은 순조로운 편이었다.

    네발표자의 발표내용도 다양했고(만주 지방, 일본인 아내, <요코이야기>에 관한 고찰 등)

    한일문제에 대해 일방적인 시각과는 나름대로 거리를 두고자 하는

    한일 양국 연구자들의 자세도 느껴졌다.

    그러나 역시'일본인 아내'와 '<요코이야기> 고찰'에 대해발표한 두 일본 연구가의 발표 내용은

    한국인인 나로서는 공감이 가면서도 어쩔 수 없이 벽에 부딪히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이 두발제자가 일본인으로서 매우전향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분으로 여겨진다)

    특히나 해방 후 일본과 한국 양쪽에서 외면 당하며 힘들게 살아온 '일본인 아내'가

    어떤 면에서 보면 '정신대'와 함께

    '일제시대 가부장제나 제국주의에 의한 여성의 피해'의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는 주장에서는

    원론적인 수준에서 일부 공감하면서도 순순히 납득할 수 없는 무언가가 분명 있었다.

    (여성학자이신 이 분의 방식이 '젠더를 통한' 접근이었으므로

    '일본인 아내'와 '정신대'를 '피해자 여성'으로서 한데 묶어 비교대상으로 삼은 것이긴 하다.

    나도 젠더를 통한 접근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양자는 등가가 아님은 물론,

    비교 자체가 무리인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요코 이야기>에 관한 발표에서도 그랬다.

    미국에서 한일 역사 이야기가논란이 될때마다

    일본측에서 제기하는 의혹 가운데 하나가

    '왜 하필지금 새삼스럽게 다시 이 문제가 '미국'에서 불거지는 것인가?'이다.

    이것은 비단 우익들만 제기하는 의혹은 아니며

    사실 따지고 보면 맞는 부분도 있다.

    일전에 미 하원에서 정신대문제에 관한 대일 비난 결의안이 가결되었는데

    가결되기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거봐라. 와야 할 것이 왔다'는 식의 반응이 있었고

    많은 일본 언론에서는 '왜 하필 지금 미국에서 이 문제가?'하는 식의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들의 결론은다는 기억나지 않지만...주로 정치적 주도권에 관한 문제였던 것 같다.

    미국내에서 한인과 중국계 교포 집단의 입김과 로비력이 커졌다든가

    외적으로는일본이 납북문제를 들이대며 북한과 자꾸 삐걱거리는 바람에

    6자회담이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는 전망 때문에 미국이 일본때리기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는 식.

    여러가지 유기적 역학 관계의 구도를 생각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는 의견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직접적이고' 지엽적인원인들만 거론했을 때

    그 효과가 어떠할 것인지는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요코 이야기>에 관한 발제에서도

    '이 책이 출간된 것이 언제인데 왜 이제 미 교육계에서 파장이 일어나고 있는가?'하는

    발제자의 문제의식에서 나는 그런 것을 느꼈다.

    (물론 이것이 이 발표의 전부는 아니었으며

    다른 부분에서는 <요코이야기>에 관한 발제자의침신한 시각-<요코이야기>의 전개 구도가

    소공녀의 그것과 대단히 닮아 있다는-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어제의 참석 목표가 일단 통역 견학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집중하는 것도 벅차서

    따로 질문은 하지않았지만...

    그런데 이날 토론의 마지막 순서인

    청중들의 질의 시간에 일(?)이 터졌다.

    잠시 한눈을 팔고 있다가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귀에서 통역기를 빼게 되었다..

    어느 대학의 선생님이신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백발이 성성한 웬 할아버지 한분께서 홀 앞쪽에 꼿꼿이 서서

    목에 핏대를 올리며 일본을 맹비난하고 계셨던 것이다...

    사실 이날의 학술적인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발언이었다.

    질의 시간인데 이 할아버지는 질의는 고사하고

    누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속사포처럼 쏘아대기만 하셨다.

    "...그런데도 일본은 반성은 고사하고!!!....이 막 돼 먹은...@@!!"

    분풀이에 가까운 할아버지의 발언을 아무도 제지하지 못하고

    홀안에는 그저 긴장된, 그리고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 뿐.

    한참 후에야 겨우할아버지는 분을 못 이기며 뒤로 퇴장하셨고

    '이제 끝났나'했더니만 또 다른 할아버지가 등장하셨다.

    격한 어조는 아니었지만 장황하게

    자신이 살던 고향에서는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인을 상대로 방화나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없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으셨다.

    두 분의 발언 모두에 대해서

    발제자의 응답은 들을 수 없었다. 사회자는

    기분을 이해한다는 짧은 멘트로 서둘러 분위기를 수습한 뒤 다른 질문자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그리고 이들의 질의응답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또다른 사회자 한분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이날의 심포지엄을 끝맺는 시간이 되었다. 역시 장황했다.

    그런데 가만히 듣다 보니 '이건 아니다' 싶은 내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해인가 베트남을 방문해

    월남전으로 아들을 모두 잃은 한 베트남 어머니가

    역시 죽은 아들의 유골을 찾으러 베트남을 방문한 한 미군 어머니에게

    위로의 뜻을 표하는 것을 보고 의아한 마음에

    베트남 어머니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우리는숱한 제국들의 침략을 받아왔다. 이렇게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가 살 수 없다'고 대답했단다.

    화해와 용서가 남은 물론 나도 살리는 상생의 방법이라는 메세지를 전하고자 한 것인 듯하다.

    하지만 이는 가해와 피해의 기억이 아직도 왜곡을 거듭하고 있는

    한일 양국에 해당되는 내용은 아니라고 본다...개인적으로....

    나아가 그 사회자는 결론 부분에서 한일 양국 모두 전쟁의 피해자이며

    따져보면 미국에 큰 잘못이 있었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도 했다.

    아주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꼭 저런 식으로 이 모임을 마무리지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고 있을 무렵...

    청중석 뒤쪽에서 갑자기 고함이 터져나왔다.

    "이제 그만 좀 하지!!!!"

    깜짝 놀라 뒤를 도니 아까 다짜고짜 일본 맹비난을 퍼붓던 그 할아버지의

    노기어린 얼굴이 보였다.

    장시간의 발표 토론에 지쳤으니 이제 막을 내리자는것이 아니라

    그따위굴욕적인 말들은 그만하라는 노여움 가득한외침이었다.

    사회자의 어정쩡한 태도가 내심 불편하셨던 모양이다.그럴만도하다 싶었다...

    그 시대를 짧게나마 경험했을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이런 학술적인 자리만큼 답답하고 기만적으로 느껴지는 곳도 없을 것이니..

    아무튼

    심포지엄은 초반의 지루함을 보상이라도 하는 듯

    이렇게 긴장된 분위기 속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저녁식사를 겸한 뒤풀이 시간.

    잠시 두 분 선생님의 노고를 치하(?)하며

    아까의 그 할아버지 이야기도 잠시 주고 받았는데

    어쩐지'갑자기 나타나 물 흐린 할아버지' 정도로 가볍게 치부되는 듯해서

    내심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게다가,

    심포지엄.

    참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식의 마이동풍/동어반복적인 대화가 정말 한일 양국 관계 발전에도움을 주고 있는 것일까?

    주고 있다면 과연 얼마나?하는 근본적인 회의도 들고...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두나라는

    지배와 피지배, 가해와 피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워지게 될까?

    그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단순히 왜곡에 순응하고 망각해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텐데,

    나만의 생각이긴 하지만아까의 그 할아버지는

    '기억으로부터 잘못된 방식으로 자유로워지고 있는' 우리 모두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에 오는 길에도

    차분했던 각 발표자들의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그 할아버지의 분기 어린 얼굴이 자꾸 떠올라

    씁쓸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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