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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 서울시청사에서 글쓰기 틔움강좌 들으며 숙제로 했던 글짓기-
나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주민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면서도 꿋꿋이 사재를 털어 동네 길고양이 밥을 챙겨 주는 ‘캣맘’이나 주기적으로 고양이카페를 찾는 사람들, 시쳇말로 ‘냥덕’, ‘고양이빠’는 못 될지 몰라도, 길에서 고양이를 보면 그렇게 측은하고 어여쁜 마음이 들 수가 없다. 이 마음이 통하는 것인지, 길고양이들도 내가 접근하면 잘 피하지 않고 오히려 졸졸 따라오기도 한다.
사실 고양이를 썩 달가워하지 않는 한국 정서상, 나 역시 처음부터 고양이를 좋아한 것은 아니다. 차고 지는 변화무쌍함이 밤하늘의 달님 뺨치는 그 요사스러운 눈동자며, 솜뭉치처럼 북슬북슬한 발바닥 속에 깜찍하게 숨어있다 수틀리면 튀어나와 기어이 피를 보고 마는 날카로운 발톱이며, 도무지 사람을 따를 것 같지 않은 그 뚱한 표정이며, 주인을 집사 취급한다는 오만방자하고 배은망덕한 (것 같은) 심성이며, 심지어 제 의지와 상관없이 갖고 태어났을 그 털색-특히 검은 고양이 네로를 연상시키는 칠흑같은 검은 색!-까지, 도대체 살갑게 느껴지는 구석이 없었다. 어스름에 인적 없는 골목길을 홀로 걷다가 왠지 강렬한 시선이 느껴져 주위를 살펴보는데 자동차 밑이나 덤불 속에 정지 화면처럼 굳어 나를 노려보는 시커먼 고양이의 실눈과 마주쳤을 때, 쭈볏 소름이 돋으며 속으로 이렇게 외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아…재수 옴 붙었네. 차라리 아침 까마귀 소리가 낫지’
하지만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 반대도 성립한다는 것을 나는 고양이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경험했다. ‘보이면 알게 되고 알면 사랑하게 되는’ 관계는 어린왕자와 사막여우 사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다던가? 그 숱한 인연들 사이에 분명 나에게 더 특별한 인연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같은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의 인연 못지않은 여운을 주고 간 고양이가 있다면, 그 묘연(猫緣)도 결코 인연보다 가볍다고는 못하지 않을까.
대학교를 2학년까지 마치고 1년 휴학을 신청한 나는 한 무명 만화가의 화실 어시스턴트로 들어갔다. ‘만화가’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일반인들이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라면 아마도 빵떡모자를 비스듬히 눌러쓴 채 한 손에는 펜, 입꼬리에는 간혹 파이프담배를 물고 네모 칸 투성이 종이와 씨름하는 덥수룩한 용모의 그림쟁이 정도가 아닐까? (하나같이 요즘의 세련된 만화가들의 모습과 동떨어진 진부한 이미지 투성이지만) 그리고 그 발치에는 열에 일고여덟의 확률로 고양이가 한두 마리쯤 똬리를 틀고 있게 마련이다. 이 가족사진에서 강아지나 금붕어의 출연 빈도는 훨씬 낮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만화가를 포함한 거의 모든 예술 계통 종사자에게 고양이라는 동물은 단순한 애완동물을 넘어 영혼의 동반자, 혹은 ‘뮤즈’가 될 수 있다고 나는 감히 단언한다, 지금은.
그러나 당시의 내게는 좁은 공간에서 고양이와의 동거를 자청할 정도의 각오는 없었다. 지정받은 자리에 무심코 앉았을 때 발치에 느껴지던 기분 나쁜 물컹함,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섰을 때 책상 밑에서 번득이던 두 눈, 잠시 후 보인 육식동물의 하얀 송곳니는 내가 만화가 화실에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고양이굴에도 들어와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바로 그 다음날부터 나와 화실 고양이 사이의 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이름은 ‘땡아’. 하얀 양말에 연미복을 빼입은 것처럼 턱과 배, 발바닥만 빼고 온몸이 새카만-하필이면 칠흑같이 검은 색!-수컷 잡종고양이였다. 한낱 어시스턴트로서 동물 취향 따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던 ‘신참’은 ‘고참’인 땡아를 적어도 겉으로나마 적대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대단한 고양이 돌보미가 된 것도 아니다. 밥 주기와 목욕시키기는 변함없이 화실 선생님의 몫. 내 역할이라 해봤자 별 게 없었다. 다만 그 심기라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나는 땡아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까이서 자주’ 보게 되는 고양이의 모습은 기존의 인상과는 좀 다른 것이었다. 대체로 화실 안은 어두운 편이었기에 땡아의 동공은 빛을 많이 받기 위해 세로로 길게 열리기보다는 동그란 모양을 유지했다.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슈렉 고양이’의 천진한 눈망울, 바로 그것처럼. 또 자객처럼 소리 없이 책상 밑에 출몰해서 사람을 긴장시키는가 하면, 마감 날 책상 위를 넋 놓고 돌아다니다가 다 그린 원고 위에 잉크병을 엎는 대참사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럴 때면 으레 화실 선생님으로부터 삼십 센티 자 끝으로 발바닥에 ‘맴매’를 맞았는데, 말이 ‘맴매’지 살짝 대는 시늉만 하는 데도 눈을 꼭 감고 자가 발바닥에 닿을라치면 발을 얼른 뒤로 빼려는 모습이 어쩜 그리 어린아이와 똑같은지. 어딘가 무섭고 다가가기 힘들던 사람이 문득 인간적인 빈틈을 보였을 때 묘한 안도감이 들듯, 땡아를 보고 ‘피식’하는 순간이 늘어나면서 고양이에 대한 편견과 경계심은 하나씩 사라져갔다.
그런데 또 ‘약간 맹해 보이는’ 모습에만 환호한다면 이는 고양이라는 영물을 너무 아둔한 존재로 격하시키는 실례를 범하는 것이다. 고양이의 다양한 모습 가운데 나를 가장 신비로운 느낌에 빠지게 한 것은 녀석들이 문득 어딘가를 지그시 응시할 때의 모습이었다. 유명한 침팬지 연구가 제인 구달이 장엄한 폭포수 앞에서 경외감에 젖은 침팬지 무리를 발견하고 그들의 신비한 영혼을 느꼈듯, 나 역시 눈 오는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며 한동안 상념에 빠져 있던 땡아의 옆모습에서 범접할 수 없는 철학자적(!) 풍모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땡아는 철학자에게 어울리지 않게 발군의 신체적 감각과 능력을 지닌 천하의 운동선수이기도 했다. 평소에 따로 운동을 하지 않기는 나와 매일반인데 어쩌면 모든 움직임이 그다지도 민첩하면서 우아했던 것일까?
영국의 철학자 마크 롤랜즈는 저서 <철학자와 늑대>에서 ‘늑대는 지상에서 2~5m 떨어진 공중을 미끄러지듯 우아하게 달린다’며 그 아름다움을 극찬했지만, 나라면 틀림없이 고양이과 동물들에게 세상의 모든 찬사를 바쳤을 것이다. 좁고 험한 지형에서 고양이가 자유낙하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작은 머리 뒤로 물 흐르듯 이어지는 등뼈와 꼬리, 네 발을 결코 인간처럼 부산스럽게 움직이지 않으면서 폭포수처럼 시원하고 백조처럼 우아하게 책장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려 사뿐히 착지하는 모습을 보며, 또 뜀틀도 장대도 발판도 필요 없이 바닥에서 꽤 높은 창틀 위로 훌쩍 비상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날개는 없지만 포유류도 어쩌면 공중을 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착각에 잠시나마 빠질 뻔했다. 물론 그 착각은 초등학교 육 년 내내 단 한 번도 뜀틀 넘기에 성공해본 적 없던 ‘어떤 포유류’의 무겁고 뻣뻣한 몸을 내려다보는 순간 금방 깨지고 말았지만.
땡아는 철학자이자 운동선수면서 명포수이기도 했다. 어려서 어미와 떨어지는 바람에 사냥을 배워본 적도 없을 텐데 그 많은 움직이는 먹잇감을 녀석은 어떻게 낚아챈 것일까? 평상시 사소하게 돌봐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지 어느 날 땡아가 내 자리에 소중한 전리품들을 선물로 놓고 간 적이 있다. 차려주는 밥만 먹는 줄 알았던 녀석이 나름의 사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아직 안 죽은’ 녀석의 야성, 사냥꾼 본능이 내심 반갑게 느껴졌다. 아, 선물이 주로 죽은 바퀴벌레나 파리, 기타 이름 모를 벌레들이어서 처리하는 데 고생은 좀 했다만.
고양이의 보은 못지않게 나를 감동시켰던 것은 화실 입문 후 두세 달이 지났을 무렵, 의자에 앉아 작업 중인 내 무릎팍 위에 훌쩍 뛰어올라 금세 잠에 빠져들던 녀석의 모습이었다. 둥글게 튼 똬리에 얼굴을 푹 묻고 안심한 듯 쌕쌕거리던 체온 38도짜리 생명체를 시각과 촉각으로 느낀 순간, 내 안에서 아직 어딘가 파충류나 양서류 등 냉혈동물 같았던 고양이라는 동물의 이미지는 따뜻한 피가 흐르는 확실한 포유류로 각인되었다. 게다가 모든 동물에게 가장 무방비상태인 ‘잠잘 때’를 나에게 허해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신뢰받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런데 고양이는 이렇게 마음을 열 때조차 ‘대놓고’가 아니라 ‘은근히’ 다가왔다가 사라질 때도 또 표표히 사라진다. 애교 또한 아무 때나 보여주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매력적인지도 모른다.
심드렁하고 까칠한 듯 은근히 애교 많은 성격, 야성미와 우아미가 동시에 빚어내는 절묘한 동선, 인간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려 하지 않는 독립성과 반면 신세 진 인간에게는 잊지 않고 고마움을 표시하는 의리까지, 땡아가 보여주었던 다양한 매력이 녀석만의 별난 개성이라기보다는 고양이들에게서 어느 정도 일반적으로 보이는 특성이라는 것을 이후 나는 많은 고양이 집사들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땡아와 이별한 후 지금까지 고양이를 키우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한껏 불출 같은 소리를 끼적여 놓고 민망하지만, 혼자 살 때는 집주인의 반대로, 지금은 한때의 나처럼 고양이라면 질색을 하는 식구들 원성에 집에서는 고양이 구경도 못하고 산다. 땡아와는 화실이 문을 닫기 전 다른 집으로 입양 보낼 때 우유 한 잔 먹인 것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안녕이다. 이후 ‘새 주인이 잘 해주는지?’, ‘새 집에는 잘 적응해 사는지?’ 궁금한 적이 많았지만 화실이 해체되면서 안부를 물을 길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은? 고양이 평균 수명이 길어야 십오 년 정도니, 십 년도 더 전에 이미 다 큰 고양이였던 땡아는 지금쯤 무지개다리를 건너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길거리에서, 혹은 일요일 아침의 애청 프로 <TV 동물농장>에서 수많은 ‘땡아’들을 본다. 끝까지 모시지(?) 못한 집사의 회한인지, 고양이 중에서도 특히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이리 치이고 저리 차이는 길고양이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 속이 울컥할 수가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식구들은 내가 행여나 밖에서 꾀죄죄한 군식구라도 하나 얻어 올까봐 겁이 나는 모양이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고양이 예찬론자가 되었냐. 하여튼 데려오기만 해보라’며 자못 살벌한 으름장을 놓는데, 그렇게 받은 경고장만 해도 나는 벌써 이 집에서 퇴장감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가련한 중생들의 무지를 탓할 생각이 없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리고 그 무지는 온갖 회유와 협박과 애걸과 복걸로도 벗어날 수 없다. 그저 일단 한번 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생명체의 집사가 되어보는 수밖에. 일전에 친구 하나는 자기네 고양이가 낳은 새끼 한 마리를 우리 집 앞에 업둥이처럼 두고 가 주겠다는 기발한 제안까지 해준 적이 있다. 그 정도면 아무리 동물을 싫어하는 식구들이라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냐는 것. 하지만 아파트 12층까지 기어 올라와 하필 우리 집 현관 앞에 탈진해있는 새끼 고양이라, 글쎄…. 공연히 고양이 공포증만 더 유발할 것 같아서 정중히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하여, 아직 땡아는 그 바통을 제대로 넘겨주지 못하고 간 셈인이지라 나는 지금도 암중모색하며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다시 한 번 이 매력적인 생명체의 집사가 되어볼 날을, 인연 못지않게 신비로운 묘연(猫緣)이 내게 닿을 그날을. 그때까지 어느 추운 골목길에서 밤이슬 맞으며 새우잠을 자고 있을지 모를 미래의 ‘땡아’들이여, 인간들 등쌀에 굴하지 말고 선전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