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국인이지만 이 나라에서 일하며 은근히 화딱지 나는 상황 중에 딱 하나를 고르자면, 누군가가 명백한 '을'이 아닌 이상, '자신의 잘못이나 무례함'에 대해 선뜻 시인하거나
"미안하다, 죄송하다"
고 사과하는 경우가 의외로 정말 드물다는 것. 메일이고 전화고. '상황이 이러저러해서 그렇게 됐다'는 변명이라도 들으면 양반이다.
오늘 서울 모지방법원에 전화할 일이 있었다.
예정되어 있던 통역을 내쪽에서 취소할 수 있는지 타진해보기 위해서였다.
이미 정해진 일을 개인적인 사정으로 취소해본 적은 여태 단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하필 같은 날 내가 어찌하기 힘든 일이 생겨 처음으로 그런 연락을 하게 된 것.
저쪽에서 도저히 취소는 안 된다 그러면 일단 알겠다고 한 뒤 다시 뭔가 방법-별로 없긴 하지만- 을 쥐어짜볼 생각이었다.
담당자가 부재중인지 신호가 한참 간 후에야 다른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이 사람도 내가 00일 참석 예정돼 있던 통역이라고까지만 얘기했는데도 사건번호가 뭐고 증인명이 무엇인지 바로 나올 정도로 해당 건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의외로 그는 선선히 '취소할 수 있다'고 했다.
혹시나 싶어 '그럼 그 건은 어찌되는 거냐' 묻는 나에게 그 직원은 '다른 통역을 구하면 된다' 고 하더니 바로 전화를 끊으려했다.
노파심에(혹시 사유서같은 게 필요하면 준비할 생각으로) '이 통화 한번으로 취소가 성립된 거냐' 묻자 그는 이번에도 '그렇다'고 했고
솔직히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상대방이 됐다는데 내쪽에서 가타부타 더 물고늘어지는 것도 이상해서 '그럼 처리 좀 부탁한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오후 늦은 시간, 이번에는 지법에서 내게 전화가 왔다.
원래 이 건으로 처음에 연락했던 담당자였고 상기된 목소리로 나를 찾더니 이름 확인이 끝나자마자 다짜고짜 따지기 시작...
왜 취소 요청을 한 건지, 먼저 걸었던 전화에서 내가 어떤 식으로 말했고 자신의 동료는 거기에 어떻게 응대했는지 한번도 확인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변호사 검사 증인 출석 모두 정해졌는데 이제 와서 통역이 "전화 한 통으로" 이러면 어떻게 하냐'는 힐난뿐이었다.
갑작스럽고 격렬한 뒷북에 무척 당황스러웠지만..꾹 참고 간단하게 경위를 얘기하자 담당자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목소리로 '확인해보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럼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득달같이 전화부터 했다는 얘기?)
참고로 재판일까지는 앞으로 2주도 더 남아있다. 내 경우 어느날 집에서 점심 먹는데 서울지검에서 '오늘 오후 3시까지' 와줄 수 있냐는 연락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시간때문에 못 갔지만 금방 다른 사람을 구했다고 들었다.
물론 법원 일은 재판이고 검찰청 일은 재판은 아니므로 일의 무게가 다르지만, 일단 2주도 넘는 시간이면 요즘같은 일가뭄에 희귀언어도 어닌 일본어 통역사는 분명 구할 수 있다. 각급 법원은 언어별로 일정 인원 이상의 통역사 풀을 항상 유지하고 있는 데다 일본어는 등록 통역사수에 비해 재판 건수는 잊을 만하면 생길 정도로 극히 적기 때문.
그래도 뭐가 어찌됐든 선약을 깨려한 건 내 책임이라 일단 '죄송하다'로 운을 뗐고, '취소하겠다'가 아니라 '취소할 수 있는지'를 정중하게 물어 그렇다는 답변을 수 차례 얻은 뒤에 정당하게 취소한 것인데
내부 확인도 제대로 안 하고 뒤늦게 이 무례한 전화는 대체 뭐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고, 대타를 구했는지 담당자의 목소리는 아까보다는 조금 진정된 듯했다. 그녀는 그제서야 취소 사유를 묻더니 확인이 끝나자 그럼 취소통보를 보내겠다며 바로 전화를 끊으려했다.
이대로는 좀 억울해서 '잠깐만요'하고 말을 막았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서두를 깐 뒤
'나는 일방적인 취소 통보를 하거나 떼를 쓰려고 전화했던 게 아니'며, '취소 가능성을 타진했다가 가능하다고 해서 취소한 것뿐이다. 오히려 당신의 동료가 너무나 선선히 오케이해서 내쪽에서 걱정된 나머지 "전화 한 통으로 되는 건지" 등 이것저것 물어보고 재삼 확인까지 한 끝에 서로 합의한 거다. 이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 제가 그런건 몰랐구요'란다.
몰랐다면 알지도 못하면서 다다다다 화부터 냈으니,
알았다면 알면서도 뒷북친 거니,
어쨌든 내 기준에서 보면 그녀는 '사과'를 해야했다.
거창한 사과가 아니라 그냥 '미안하다' 한 마디라도..
업무에 지장이 생긴 게 너무나 분해 그 말 한 마디조차 하기 싫다하더라도,
뜬금없는 무례한 전화에 대해 최소한의 '양해'는 구했어야 하는 게 아닌지?
하지만 끝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몰랐다'는 말을 마친 후 그녀는 수화기 너머로 총총히 사라졌을 뿐.
순간적이긴 했지만, 앞으로 그곳 일은 아예 거절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하면서 느낀 이런 사례는 무척 많은데, 일할 때만 느끼는 것도 물론 아니다.
붐비는 버스나 전철에서 발을 밟히거나 누가 내 가방이나 몸을 때리듯 격하게 지나쳤을 때에도,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특히 장년층으로 가면 갈수록 더욱더.
아, 남의 정강이를 우산으로 쳐놓고 태연하게 '아파요?' 하고 물어보신 할머니는 계셨다.
출근전철에서 너무 사람이 많아 더 들어갈 곳 없이 문가에 서있는 내게 '혼자 버티고 서있지 말고 저리 좀 가라'며 사람을 있는 힘껏 밀치던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좁은 길에서 마주보고 걸어가는데 지팡이끝으로 사람을 가리키며 '길옆으로 비키라'고 일방적인 양보를 강요하던 할머니도 계셨다.
이 나라에선 왜 이렇게 나보다 약해보이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땐 그토록 추상같으면서
자신의 일상적인 무례에는 그만큼 무감각한지?
왜 이렇게 미안하다는 그 한 마디에 인색한지?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살아본 게 아니라 객관적인 비교는 힘들겠지만
내 이런 상황 판단이 직관적일지언정 아주 틀린 판단은 아닐 것 같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작다면 작고 사소한 일인데, 왜 점점 이런 일들에 환멸을 느끼는 걸까,
어쩌면 이런 사소한 것에도 피로가 쌓이는 나도 표현방식만 다를뿐 정신 상태는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겠다는 생각도 들면서..
...
그래도,
사과 할 땐 하고
받을 때는 좀 받으며 살고 싶다.
참 길고도 구차한 글이다...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