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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연금술사, 슈가맨을 찾아서(<Searching for Sugarman>)
    보고 듣고 읽은 것들/활똥사진 2014. 6. 23. 00:53

     

     

     

     

    "아니 왜 그렇게 수녀님처럼 살아요?"

     

    얼마전 아는 사람이 무심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여럿이 모여 저녁식사 하는 자리에 아래위로 검은 옷을 입고 나갔다가 들은 말이지만 단순히 옷의 색깔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작년에 아버지 일을 겪은 뒤 두문불출하며 끝없이 아래로 아래로 침잠하는 생활 속에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일종의 정신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권태와 정체기에 빠진 듯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런 수도승 같은 생활에서 조금 벗어나볼까 싶어 이것저것 건드려보다가 한동안 소원했던 소위 '비주류 영화들'에까지 손을 뻗게 되었는데 지난 화요일에 본 <그레이트 뷰티>와 어제 본 <HER 그녀> 가 그것들이었다.(사실은 여행을 떠나고 싶었지만 어머니 건강 상태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 중 <그레이트 뷰티>는, 스스로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대충 알고 바로 그런 혼돈(?)을 찾아간 것이기에 큰 불만은 없었지만 역시 다소 난해한 부분이 없지 않았으며 ㅎ <HER 그녀>는 배우들의 호연과 공감가는 스토리-싱글스토리는 찌질하게 그려야 제맛!-덕에 집중해서 볼 수 있었지만 약간 진부한 설정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컴퓨터나 사이보그 로봇 따위와의 사랑은 어디선가 본 듯한 데자뷰를 자주 일으키므로...)

     

    그리고 엊그제 자기 전, 일전에 핸드폰에 다운받아놓은 영화를 별 생각 없이 틀었다.

     

    <서칭 포 슈가맨(Searching for Sugarman)>...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 다큐멘터리가 갖는 허세 부리지 않는 현실성과 '이게 실화?'하는 생각이 들게끔하는 비현실성을 동시에 지녔다. 그런데 백만년만에 영화 감상 후기 따위를 쓰는 것은 단순히 그런 장르적 미덕 때문은 물론 아니다.

     

    1970년대 초반 미국 디트로이트. 지금은 완전히 몰락해 잿빛 폐허나 다름없이 변해버린 이 도시가 한창 자동차 왕국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공사장 노동일을 전전하던 한 가난한 사나이가 두 장의 음반을 낸다. 검은 머리에 선글라스, 정장을 입어도 어딘가 히피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이름은 '시스토 로드리게즈'. 사람들은 그를 처음 본 순간 느꼈던 '현자', '음유시인', '철인(哲人)'과도 같은 비현실적 아우라에 대해, 한 시대 한 나라가 외면했지만 언제까지나 묻혀있을 수는 없었던 시퍼렇게 벼려진 칼날같은 예술성에 대해, 담담하게 혹은 탄식하듯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놓는다.

     

    버려진 걸작, 저주받은 천재들이 대개 그렇듯 그가 취입한 두 장의 음반은 마치 거짓말처럼 '철저'하게 외면받는다. 그는 노래 가사 속에서 스스로 예언했던 대로 '크리스마스 2주 전에 (음반회사로부터) 해고'되었으며 그의 음반은 전미 공식 판매량 총 6장을 기록하며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져간 것이다...

     

    무대가 바뀌어 카메라가 비춘 곳은 지구 반대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 케이프타운.

     

    세계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가혹한 인종차별 정책이 사회곳곳에서 버젓히 자행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에도 불구하고 부조리한 체제가 아직 건재하던 엄혹했던 시절.

     

    이때 아주 우연한 계기로 로드리게즈의 음반이 남아공으로 흘러든다.

     

    그의 저항적인 노래 가사는 오랜 세월 체제의 부조리에 신음해온 사람들의 마음을 메마른 대지에 내리는 단비처럼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음반은 불법복제물일지언정 날개돋친듯 팔려나갔고, 당국의 삼엄한 검열과 통제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살아남아 빠르게 남아공인들의 일상이 되어갔다.

     

    그렇게 '엘비스 프레슬리'보다도 '밥 딜런'보다도 유명한 수퍼스타가 된 로드리게즈였지만 당시의 남아공은 대내적으로 철권통치사회였을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지독하게 폐쇄적인 사회였다. 남아공 팬들은 자신들의 우상인 로드리게즈가 미국에서 수퍼스타는 고사하고 음반을 낸 가수라는 사실을 아는 이조차 거의 전무한 그저 한 사람의 가난한 노동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1998년까지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로드리게즈의 죽음에 대한 묘사가 나오고, 두 명의 열혈 남아공 팬들이 로드리게즈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하는 부분까지 영화가 진행됐을 무렵에도 나 역시 이 영화의 결말은 제대로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이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다만 예술가들니까, 일반인들은 미처 모르는 자신만의 고뇌를 이기지 못해 요절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지지리 가난했다는데.. 음반이 미국 전역에서 딱 6장 팔렸다는데..'

     

    나의 이런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생각의 추가 이미 '로드리게즈=요절한 천재 가수'로 팔할은 기울었을 무렵, 거짓말처럼 그의 딸이 말한다.

     

    '아버지는 살아계시다'고.

     

     

     

     

    이때 느낀 얄궂은 감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그를 덮고 있던 신비의 베일이 한꺼풀도 아니고 홀라당 벗겨지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싫었던 그 마음 속에는

    '나는 못 해도 다른 사람은, 특히나 특별한 사람들은 이래 주었으면'

    하는 얄팍한 이기심이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술이란 예술가들의 것이니까, 아름다움이란 특별한 이들이 창조해내는 비일상의 덩어리니까, 그러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예술가'가, 비루한 일상을 묵묵히 받아들여 근근이 밥이나 먹고 살고있든 어딘가에서 자수성가해서 그럭저럭 먹고살고 있든, 하여튼 나와 같은 평범남녀의 속물적인 삶을 40년이나 살아왔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ㅆ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여러 명의 식솔을 거느리며 하루하루 근근이 밥이나 벌어먹는 가난한 노동자로 그렇게.

    세상을 바꾸어보겠다고 시장직에 도전했다가 낙선하기도 하면서,

    음악인이기를 포기한 철저한 생활인으로 그렇게...

     

     

    생각나는대로 적느라 앞부분에 관한 글이 필요이상으로 길어졌지만, 아니 필요이상이라고 하기에는 앞부분도 너무나 드라마틱한 게 사실이지만, 정말 인상깊은 부분은 바로 지금부터였다.

     

    수십년 동안 자신을 애타게 그려온 남아공 팬들과의 감동의 첫만남과, 어마어마한 부자가 될 수 있음에도 다시 지난 40년 동안 살아온 누추한 집으로 돌아가는 천재 예술가의 모습...이 모든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지나,

    직장 동료가 로드리게즈가 평생토록 간직해온 삶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

     

    "이 지저분한 일(오물 치우기, 공사판 일)을 8~10시간씩 하면서도 턱시도를 입는 거예요. 로드리게즈는 진정한 시인이나 예술가만이 지닌 신비한 힘으로 주변에 널린 평범하고 속되고 비루한 것들을 탈바꿈시켰어요. 그가 보여주는 건, 선택할 수 있다는 거죠. 그 많은 고통과 슬픔을 그는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시켰어요. 누에고치처럼. 그런 면에서 그는 인간의 영혼을 대표한다고 생각해요"

     

    이쯤되면 유황과 수은처럼 흔해빠진 광물을 섞어 황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사의 그것이 아닌가?..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일상이 정말 그랬다. 호~하고 불면 지금이라도 뽀얗게 입김이 서릴 것만 같은 스산한 집안에서 직접 장작불을 때는 그의 모습이 그랬고, 아침이 되면 일하러 나서고 저녁이 되면 돌아오는 그 단조로운 출퇴근길 모습이 그랬다. 분명 비루하고 지겨운 나나 우리의 일상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무언가 아주 신성한 일을 하고 있기라도 하듯, 가만가만 진지해보이는 그의 자세만이, 권태와 피로, 무감각함에 절어있는 나와 다를 뿐이었다.

     

    그렇게 한결같은 자세로 그는 40년을 지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았던 조국의 차가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뒤늦게 접하게 된 머나먼 타국으로부터의 뜨거운 러브콜에도 초연한 채.

     

    그 모습은 차라리 하나의 종교적 아름다움에 가까웠다. 찬란하고 화려한 색감뿐 아니라, 심금을 울리는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뿐 아니라, 어쩌면 오랜 세월동안 한결같이 간직해온 삶에 대한 경건한 자세 자체도 '아름다움'이라 표현될 만한 것이 아닐지.....<그레이트 뷰티>가 제목에서부터 드러내놓고 추구했지만 끝내 나처럼 아둔한 관객에게는 친절히 가르쳐주기를 거부하는 듯했던 그것에 대해, 이 영화는 바로 이 부분에서 너무도 단순하고 명료하게 말하고 있다. 마치 눈 앞에 주사위를 던져주며 그 눈을 읽어보라고 하기라도 하듯.

     

     '너의 일상으로 돌아가. 그리고 거기에 집중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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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녀님과도 같은 삶'은 벗어나고 피하려 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제부터 정말로 추구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PS>쓰고보니 완전 스포일러 포함이 되어버렸지만, 이미 써버렸으므로 어쩔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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