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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남국의 섬, 당근도)
토요일 점심.
식구들이 모두 외출해서 집에 아무도 없는 것보다
반찬이 다 떨어져 냉장고에 김치밖에 없는 것이 서러운 토요일 점심.
뭐라도 만들어야겠다 싶어 야채칸의 야채들을 몇 가지 다듬다보니 당근 꼭지가 남았다.
엄마는 종종 이런 것들을 물그릇에 담아 싱크대앞에 놓고
설거지 할 때 바라보며 연신 "예쁘다, 예쁘다" 했었다.
고구마, 양파, 당근 등...
내 눈엔 잘해야 지저분한 수염 정도로만 보이는 식물 뿌리나 싹이
뭐가 그리 예쁘다는 것인지.
싱크대앞 창가에 올라앉은 당근 꼭지를 바라보며 설거지를 하는데
잘 보니 당근 꼭지가 야자수 울창한 무인도로 보인다.
더 가만히 보니 은근 어딘가 귀여운 것 같기도 하다.
설거지 하다 말고 무인도에 한번 가보기로 했다.
듣고 있는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이나 로이킴의 '봄봄봄'과는 좀 안 어울리는 계절감이지만
어쨌든 무인도에 가서 시원하게 발도 담그고 오고...여행을 마쳤다.
(참고로 상상속의 모델은 며칠 뒤면 네 살이 되는 친구 딸래미. ㅋㅋㅋ)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나니 어제부터 물대접 안에서 반신욕중인 감자가 눈에 들어온다.
엄마는 어제 이모네 가셔서 내일 오시는데,
감자로 뭘 만들려고 깎아뒀다가 잊으신 건지, 나보고 뭐라도 만들란 뜻인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이걸 그냥 뒀다간 엄마의 옴팡진 잔소리는 내것이 된다는 것뿐...
감자로 무얼 할까. 감자채 볶음? 감자전? 감자사라다? 으음...아니야...
생각해보니 몇년전 친척 오빠가 그리스에서 선물로 갖고온 꿀이 있었다.
꿀에는 개미가 꼬이지 않는다더니, 과연 몇 년 째 상온 보관해도 끄떡이 없다.
좀 무섭다. 그래도 찍어먹어보니 이거 먹는다고 큰 일은 안 나지 싶다.
좋아, 허니버터칩을 만들기로 했다.
한번도 본 적 없고 먹어본 적 없으니 기준이 될 만한 건 인터넷 레시피 뿐.
올개닉 뭐뭐 재료로 만들었다는 최고급 수제 허니버터칩 따위의 레시피를 가뿐히 즈려밟고
가장 저렴하고 쉬워보이는 레시피로 ㄱㄱ.
오, 좋아. 모든 재료가 우리집에 다 있다.
파슬리가루만 빼고. ㅜ_ㅠ
이게 없으면 자취생 레시피 비주얼이 된다. 그건 또 싫다.
그렇다고 사러 나가기도 싫다. 오늘 한번 쓰고 이 년 쯤 지나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테니...
(라고 쓰고 '옷 갈아입고 나가기 귀찮아서'라고 읽는다)
결국, 냉장고에서 내 도전정신을 자극할 만할 녀석을 발견했다.
기껏 만든 달콤한 감자칩에서 특유의 그 냄새만 안 나길 바라며 고른 것은...깻잎...!!!
잘게 썰어 뿌리면 깻잎인지 색종인지 알게 뭐람...
아무튼 이렇게 재료 준비는 완벽. 만들기만 하면 된다.
채칼 따위 없어 식칼로 감자를 일일이 슬라이스하고
전분을 빼고 말린 뒤 여러번 뒤집어가며 렌지로 굽는 과정도 귀찮았지만
의외로 더 귀찮았던 건 만들어진 허니버터소스?를 일일이 바르는 작업.
기름에 튀기지 않고 렌지로 구운 감자들은 수분이 날아가며 크기와 두께가 작아지는데,
종잇장처럼 얇은 감자칩에 끈적이는 소스를 바르다가 부숴먹은 것만 감자 한 개분.
총 세개 구웠는데 수분이 날아가서 그런지 만들어진 양은 정말 적다.
다른 과자는 모르겠지만 감자칩과 묶음 판매 되는 질소의 양에 대해서만큼은 조금 납득이 간다.
(사진=오늘의 최고 잉여짓의 결과물인 '깻잎'허니버터칩의 사랑스러운 모습. 뒤에 걸레 뭐야ㅠ)
(사진=소스를 골고루 바르는 데에 실패한 '깻잎'허니버터칩과 Tistory에서 준 맥주 스티커;;;)
이래 봬도 이게 중간 크기 감자 두 개 정도.
더 놀라운 건 버터와 꿀이 각각 작은 국자 하나씩 들어갔다는 사실.
맛은...나쁘지 않았다고....생각한다...만
내가 뭐라도 먹을 걸 만들면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그 (많은or좋은) 재료를 쓰고 맛이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_-;
아무튼
저걸 '징비록' 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개객끼 하다 보니
어느샌가 다 먹었고 없다. 칼로리가...칼로리가...ㅜㅜ
..따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맥주는 안 마셨으니까, 괜찮을거야.
대신 내일은...
밥이랑 김치만 먹어야겠다.
대신 밥을...김밥을 말아야지........재료는 역시 냉장고에 있는 것들로! ㅎㅎㅎ
이상, 잉여에 겨워 써본 오늘의 그림사진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