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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응답하라 1988 @응암동
    걷고 쓰고 그린 것들/터벅터벅 2018. 10. 3. 18:25
    개천절.
    남친과 소원하고 갑자기 누군가를 불러내 만날 생각도 없어 무얼할까 생각하다가 문득 응암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4학년초까지 살던 곳.
    전철은 3호선 녹번역.
    2000년 초 무악재 화실 다닐 때 어느날 한번 다녀가고 거의 20년만이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가장 오래된 기억들이 만들어진 곳이니
    내 고향이라 해도 되겠다.

    가는 내내 전철에서는 건축가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를 읽었다.
    책 초반부에서 저자는 이 나라의 학교 건물이 얼마나 교도소와 비슷한지 시종 탄식하는데
    어디 학교뿐이랴, 급속한 도시화 산업화 속에 전국을 뒤덮은 건물이.

    응암동은 최근까지만 해도 서울시에서도 손꼽히는 슬럼 지역, 낙후된 동네의 대명사였다.
    요즘은 재개발 건축이 한창이라 들었는데
    과연 어떨까 하는 마음을 안고 개찰구를 지나 계단을 다 올라왔을 무렵,
    20년만의 귀환을 현대건설이 반겨주었다.
    재개발이 완료되어 이번 달에 입주가 시작되는
    단지가 출구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모양.

    출구를 나오면 바로 오른쪽으로 소방서, 거기서 더 가면 내가 3년 남짓 다닌 은평초등학교가 나온다.
    과연 유현준씨의 말대로 교도소와 비슷한 모양새긴 하다.
    그래도 이 복작복작한 동네에서 한뼘보다 큰 하늘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고
    요즘 생기는 학교 건물에서는 보기 드물게 넓은 운동장이 있어
    내 그리움 속에 작지 않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얼마전
    초등학생이 자살하는 가슴 아픈 사건이 은평구내 한 초등학교에서 벌어졌다.
    은평구에 초등학교가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학교인지 밝혀지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은평구'라는 지명만으로도 왠지 더 남일같지 않아 수십년만에 찾은 교정에서 학교를 바라보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주저앉아 스마트폰을 보는 아이들이 몇몇 있을 뿐.
    학교는 고요했다.
    나는 내가 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도 있었을 것 같은,
    기둥이 제법 굵은 나무들이 여전히 엎치락뒤치락 얽혀있는 등나무교실에 앉아 나무 덩굴을 매만지다가 교정 가장자리, 건물 그림자를 따라 교사 주위를 빙 돌아 걷기 시작했다.
    가장자리 공간에는 은행나무도 있고 층층나무 전나무 사철나무 느티나무 메타세콰이어도 있었다.
    이 중 아름드리 나무는 분명,
    29년 전 그때도 아마 있었을 거라고,
    나를 기억하냐고 묻고 싶었다.

    교사 사잇길에서 보이는 신축 아파트.

    학교 맨 뒤 공터에 서 있는, 길이도 굵기도 쌍둥이처럼 같은 두 그루 매타세콰이어.
    남친과 저렇게 되고 싶었는데.
    분위기를 깨는 '입주를 축하합니다' 가림막을
    무슨 생각인지 슬쩍 구석에 넣어 찍어버렸다.

    급수대 주변 모습.
    그런 글을 읽고나서 봐서 그런지 정말 학교 건물의 모든 것이 교도소를 떠올리게 하는데
    딱 하나, 수채화 그릴 때 쓰는 접이식 플라스틱 물통이 이곳이 학교임을 알려준다.
    나도 딱 저렇게 생긴 물통을 썼는데..ㅎ

    학교 정문을 나오자마자 '아빠! 대형트럭 때문에 등하굣길이 무서워요!'라고 호소하는
    주민들의 가림막이 한켠으로 보였다.
    주변 재개발 건축 현장에 대한 불만의 소리였다.
    과연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는 곳답게
    골목마다 대형 트럭이 들락거리고 있었고
    사방에서 망치 소린지 드릴 소린지
    뚝딱뚝딱 드르르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원래 학교 정문 바로 근처에는 육교가 있었는데
    언제 철거됐는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은평로를 따라 걷다가 오른쪽에 도원극장이 나올 즈음해서
    대로 왼편, 은평로 16길로 들어서면
    '우리집'으로 가는 길의 막바지에 들어선 것이다.
    다래원이라는 중국집 자리에는
    -내 생각에 세상에서 가장 맛난 짜장면을 뽑아내는-역시 중국집 '아사원'이 있었고
    뽀들이함바집 자리에는 동네서 가장 크고 번듯한
    '한일슈퍼'가 있었다.
    좁다란 골목 속 옹기종기 들어서 있던 평범한 가게들이었지만
    어린 내게는 세상에서 최고, 아니면 모르긴 몰라도 서울서 제일 가는(서울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진지도 몰랐지만) 가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공사 현장이 많아서인지
    함바집들이 많이 들어서 있고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인부들이 거리에 많이 보였다.

    원래 학교는 어디든 갈 때면 대로변으로는 잘 안 다니고 사이사이 골목길로 다녔는데
    지금은 재개발 건축현장이 되어 골목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이 길로 들어서서도 응암교회(사진 왼쪽 위, 제일 멀리 보이는 갈색 건물) 바로 앞에
    녹번시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었는데
    시장마저 없어진 건지 아무리 기웃거려 봐도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라곤
    이제 그저 내 머릿속에만 남아있는 시장 속 가게들의 위치,
    예를 들어 젊은 시절 엄마가 자주 가서 수다도 떨고 컵받침 같은 것도 만들어오던 뜨개질집이며
    알록달록한 포장지에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박힌 가공식품들이 잔뜩 진열돼 있던 수입식품점,
    시큼하고 비린내를 풍기는 시뻘건 젓갈들이 바구니바구니 담겨있던 어물전과 젓갈집,
    시장 끝자락의 학교로 빠지는 입구 앞에 서서 내 아버지의 주머니를 심심찮게 털던 커피 자판기 따위의
    꿈같고 거짓말같은 이미지뿐이다.

    응암교회를 왼편으로 끼고 돌아 올라간 곳에 우리집 건물이 나온다.
    주변이 온통 새 빌라촌으로 탈바꿈하는 와중에도
    기적처럼 남아있는 한 동짜리 연립 주택...
    아저씨 아주머니들께서 화초에 물을 주며 담소 중이라
    대놓고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사진 속 건물은 우리 집 맞은 편 철물점 건물이다.
    화초에 물 주던 아저씨 때문에 화분을 빠져나온 물이 바닥을 타고 철물점 으로 흘러들고 있다.
    철물점은 내 어렸을 때도 철물점이었다.
    나중에 엄마한테들은 얘기지만옛날과 주인이 같다 한다. 
    그 맞은편 응암교회 앞에서 호떡을 구워팔던 아이가 다섯이나 되던 젊은 아주머니는
    이제 자식 손주들과 편안히 지내고 계실까.

    길 오른쪽에 빼꼼히 보이는 건 응암교회다.
    당시 나는 응암교회보다 큰 건물은 본 적도 없었고
    아마도 역시나 '세상에서 제일 큰' 교회일 거라 생각했다.
    개구멍으로 기어들어갔다가 교회 목사에게 목덜미 잡혀 쫓겨나오던 교회 놀이터는 당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길 위로 더 올라가면 소년원 터, 도티병원 부지가 나오는데 지금은 역시 재개발로 어수선해진 느낌이다.
    올라왔던 길을 내려와 역촌역 방면으로 걸어가다 보면 왼편으로 작은 가구거리거 나온다.
    그때도 리바트 같은 가구점의 쇼룸이 들어서 있어
    제 방 하나 갖기가 꿈이었던 나를
    성냥팔이소녀처럼 유리창에 코 박고 하염없이 서 있게 만들곤 했더랬다.

    길 끄트머리에 있는 건 우리은행.
    그 당시에도 한일은행(우리은행의 전신)이 있던 자리라
    반가운 마음이다.
    거기서 우리은행을 끼고 서부등기소 쪽으로 걸어올라가면 맞은편에
    엄마가 자주 다니던 연금매장 자리가 나온다.
    반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신분 덕에
    엄마는 연금 납부자로 이 매장(마트)에 다니며 나름 자부심도 느끼셨던 것 같다.
    나는 일기장에 이 매장에 다녀온 일을 적었다가
    담임선생님께 불려가 매장이 정확히 어딘지 설명해야 하기도 했다.

    은평로를 다시 거슬러 올라와
    지금 나는 도원극장 터 옆의 한 커피숍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지도앱에서 '도원극장'을 찾아 보았지만
    '도원극장이 옆 마을마당'이라는 작은 쉼터만 검색될 뿐이다.
    그마저 마을 마당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너무나 단촐한 벤치...
    역시 내게 '세상에서 가장 큰 극장'이었는데. ㅎ


    __________________

    추가)
    카페에서 이 글을 대충 적고 나니 저녁 6시가 훌쩍 넘어
    아까 점찍어둔 국수집으로 향했다.
    대단히 맛이 있어 보인다기보다는
    어쩌면 2000년에 왔을 때 갔던 국수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인 아주머니는 가수 김건모가 나와 어디선가 토란?을 파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계셨다.
    가게 문이 비스듬히, 혹은 아예 열어젖혀진 채
    티비 프로그램 소리가 밖에까지 여과없이 들리는 것도
    어딘가 낯익은 장면이다.

    잔치국수와 김밥 한 줄을 시켜 먹고 있노라니 김건모의 노래 소리가 들렸다.
    제목은 '서울의 달'.
    내가 안양으로 이사오고 얼마 되지 않아 대히트한 드라마 '서울의 달' 주제가를 리메이크한 건가 했지만 아닌 모양이다.
    그 드라마 주제가라면 아직도 기억난다.

    저녁을 다 먹고 사장님께 여쭤보았다.
    "사장님, 여기 가게 언제부터 하셨어요?"
    "4년 전이요. 원래 쩌ㅡ족에서 했는데 일루 왔어요. 왜요?"
    "아 제가 꼬맹이 때 이 동네 살다가 중간에 커서 한번 온 적이 있는데 그때 밥먹고 간 집인가 해서요."
    "그러시구나. 지금은 어디, 좋은 데로 이사가셨어요?"
    "아.. ㅎ비슷한 데로 갔어요. ^^;;;"

    역으로 가기 위해 아까 왓던 길(은평로)을 되돌아가면서
    서울의 달 주제가를 중얼중얼 불러본다.
    노래 가사와 반대로 나는 서울에 살다가 안양으로 이사온 케이스지만
    그리고 그렇게 세상 풍파에 시달린 것도 아닌데도
    이 노래 가사는 그런 내게도 뭔가 사무치는 데가 있다.
    아마도 은평구 응암동이라는 동네가
    여느 지방 못지 않게 수더분한 동네였기 때문이리라.
    이곳의 모습이 바뀌어간다고 내가 씁쓸해 한다면
    너무나 이기적인 감상주의라고밖에 할 수 없다.
    지금 내가 살고있지는 않지만
    동네가 계속해서 깨끗하게 정비되고
    쇠락한 이미지를 벗어가길 바란다.
    하지만 마을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들은 좀 그냥 두면 안 되는 걸까.
    극장도 시장도 모두 자취를 감춘 것은 못내 아쉽다.

    엊그제는 동인천역 인근 미림극장이 경영난에 처해있다는 뉴스를 봤다.
    우리 어머니 처녀 때 나름 단골 극장이었고
    요즘 어르신들의 만남의 공간처럼 운영되고 있다는데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하니
    조만간 엄마 모시고 가봐야 할 것 같다.

    마지막 사진.
    장식용 유리구두가 퍽 고고하개 진열돼 있던
    3호선 역사내 구두가게 자리.
    그 후 어떤 가게가 됐는지 몰라도
    이미 오래 전에 폐업한 것 같다.
    주변 아파트 입주가 마무리되면
    역사는 또 어떤 느낌으로 새단장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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