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0일 아침.
눈은 떴지만 이불을 걷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 이불 바깥쪽에 설마
전날 저녁 내내 티비에서 떠들어대던, 그런 믿을 수 없는 세상이 펼쳐져있으면 어쩌지...아냐 아닐 수도 있으니 일어나 티비를 켜볼까...하지만 그랬다가 정말이면 어쩌지...
고요한 원룸 구석 침대 위에서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쓰고 무의미한 자문자답 속에 한참을 뒤척거리고 있었다.
등교거부하는 초등학생도 아니고...삼십대중반 어른의 행동이라 하기엔 민망하고 유치한 것이었지만
일단 일어나면 나는 아무도 없는 원룸의 적막함을 견디지 못해 결국 티비든 컴퓨터를 켤 것이고 그러면 그 속에서 무차별적으로 쏟아져나올 말과 글을 혼자서
감당할 자신이 정말로 없었다.
겨우 마음을 다잡아 티비를 켰고 십초도 안 돼 다시 꺼버렸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세상이, 꿈처럼, 악몽처럼 펼쳐져 있었다.
탄식이 흘러나왔다.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한 뒤 쫓기듯 집을 나섰다.
도저히 그 방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심복에게 암살당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그때 그 사람',
늘 선글라스 낀 모습만 봤던 탓에
눈에 서린 표정을 읽을 수 없어 무서웠던 그 사람이,
아니 그의 혼령이 누군가에 빙의해서 지금 이 나라로 다시 돌아온 것인가...
마치 그 귀신이 그 방에 있기라도 하다는듯 서둘러 방을 뛰쳐나온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종로와 혜화 일대를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터벅터벅 돌아다녔다.
이후 별의별 시대착오적 퇴행적 일들이 뉴스와 신문지면을 장식해도 그날만큼의 당혹스러움을 느낀 적이 없는데
오늘 비슷한 느낌이 든다.
무력하고 한심하고 어이없고 황당해서 냉소하게 되고 노려보게 된다.
나도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기성세대'가 될 텐데, 아니 이미 기성세대일지도 모르는데
어쩌다 이런 세상의 어른이 됐지.
그래도 다음 세대가 있으니 앞으로라도 내 본분을 다하면서 투표 열심히 하고 정치에 관심도 가지고...
예전 같았으면 이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을 텐데
이젠 염치 없게도 다음 세대 운운하기 전에 내가 먼저 여길 떠나야 하나 하는 생각만 든다.
머지않은 것만 같아서다.
브레이크 고장난 채 미친듯 역주행하는 차가
어딘가에 크게 처박힐 날이...
그 전에 이제 정말 다른 차로 갈아타야 하는 건가...
그럴만한 여유는 남아있는 것일까.
아니 이미 처박힌 건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아직도 그 날의 이불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무의미한 자문자답만 되풀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