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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vs알파고, 그리고 한 통의 편지골판지 2016. 3. 10. 01:23
'벨레로폰의 편지'라는 것이 있다.
A가 B의 부탁으로 C에게 편지를 전해주러 가는데
사실 그 편지 안에는 A를 곤경에 빠뜨리는 내용이 적혀있는 경우를 말한다.
벨레로폰은 그리스로마신화 속 인물로, 자신에게 해가 되는 내용이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누군가의 지시로 한 통의 편지를 들고 여정에 나선다.
어제 하루, 이 편지 이야기가 오랜만에 생각났다.
뜬금없이 그리스로마신화로 시작하긴 했지만,
사실 어제 오후 1시 이후 TV나 포털 메인화면을 온통 장식한 것은 바둑, 바둑, 바둑 얘기였다.
심지어 JTBC 메인뉴스에도 아마 몇 단 보유자라는 기자가 나와 한편의 대국을 복기할 정도였으니
인간 vs AI의 바둑판 위 대결이 흥행에는 확실히 성공한 것 같다.
바둑의 '바'자도 모르는 나조차 이 대국의 결과가 지난달부터 줄곧 관심사였다.
요몇년 여기저기서 인공지능이니 빅데이터니 딥러닝이니 하는 말들을 주워들으며
기계의 발달 수준에 호기심이 일던 터라 나름 인공지능 프렌들리한(?) 관심을 갖고 지켜봤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막상 지고나니 '헐...이 정도야?...'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인류대표 이세돌의 선전을 내심 꽤 응원했던 모양이다.
오늘 오후에 있을 2차전과 이후의 모든 대국에서도 변함없이 인간 이세돌을 응원하겠지.
하지만 사실 그것은 이성을 떠난 '지극히 인간적인 바람'일 뿐,
이미 아주 인간적인 지능을 요하는 곳이라 여겨졌던 분야에서조차 기계의 지적수준이 인간 턱밑까지 치고 올라와있다는 것,
기계에게는 전진만이 있을 뿐이라 이번에 져도 머지 않아 다시 도전해 올 것이고
그때는 지금보다도 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으리라는 것,
그러니까 알파고든 베타고든 기계가 인간을 이기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미 대부분 인정하고 있었다.
어제 밥을 먹는데 언니가 물었다.
"만약 네가 이세돌이라면 구글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 같아?"
"...흠...언니는?"
"나라면 절대 안 받아들여."
"...나라면...아마도...받아들였을 거야. 상대가 기계냐 인간이냐가 문제가 아니고 이런 승부는 필연이니까. 오늘 아니면 내일, 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대결을 청할 텐데... 승부사라면 도전에 응해야겠지, 어쩌겠어."
받아들이고 싶어 받아들이고 그러기 싫어 안 받아들이고가 아니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이럴 때 한 개인의 거부? 도피?는 별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럴 바엔 차라리 부딪쳐봐서 상대의 수준이라도 가늠해두는 편이 낫다는 것이 내 생각.
그래야 별 위기감 없던 사람의 현실 인식도 조금이나마 분명해진다.
이런 대화를 나누며 중간중간 대국 전개 상황을 살펴보자니
이세돌이, 아니 인간 전체가-
아, 구글 연구원은 빼줘야 하나?-벨레로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자신의 손에 들린 편지 속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있는지,
그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우리는 그 편지를 열심히 전달하러 간다.
그 과정에서 하나씩 과업을 성취하고 작은 성공을 맛보면서,
처음에 그나마 있었는지도 모르는 경계심은 점점 사라지고
우리에게는 낙관과 자신감도 생겨난다.
한동안 승승장구할 수도 있다. 신화속 벨레로폰처럼.
이야기의 마지막.
벨레로폰은 우여곡절 끝에 죽음을 모면하며 점점 강해지고, 동시에 교만에 빠진다.
많은 신화에 수없이 등장하는 '교만해진 인간'은 하나같이 신의 노여움을 사서 파멸한다.
벨레로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진부한 결론이다.
하지만 진부할 수록 그 신화의 주장에는 인정하기 싫은 현실성이 깃든 경우가 많다.
무인자동차 분야의 선두업체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CEO도 '인공지능 연구는 악마를 불러들이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했다던가.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은 이번 대국에 대해 '알파고와 이세돌 중 누가 이기든 승자는 전 인류'라고 했다지만
이 말이 사람들이 구글에 반감을 가질까봐 던진 립서비스라고 한다면 지나친 폄하일까?
인공지능에 대해 걱정반 기대반이었던 마음의 저울이 어제는 걱정쪽으로 꽤 기울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주 예상 못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머릿속으로 '인간이 질 확률이 크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과 그 인간이 실제로 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퍽 달라서,
후자는 별 수 없이 일개 인간에 불과한 나에게도 감정적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아마 단순히 '지능' 문제뿐 아니라 결국 이런 '마음' 때문에 우리는 기계에 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부정적인 얘기만 썼는지 모르겠는데...
뭐, 낙관론자들도 있다고 하니 일단 그들의 말에도 귀를 귀울여봐야겠지만,
아무래도 '첫' 대국의 결과가 조금 충격은 충격이었다.
두 번째 대국은 오늘 오후 1시부터.
오늘은 오늘의 결과가 나오길 기대하는 한편으로,
자꾸 우리가 들고 있는 편지봉투를 뜯어 안에 적힌 내용을 보고 싶어만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