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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업실에서_37] 머릿속으로는 손목을, 손으로는 사과를...그리다
    걷고 쓰고 그린 것들/터벅터벅 2020. 4. 16. 19:28

    조금 힘든 상태에서 그린 최선의 사과

     

    극심한 수면장애로 정신줄 놓고 산 지 대체 며칠, 몇달째인지 모르겠다.
    이제 누구에게 털어놓기도 민망하고, 그렇게 혼자 끌어안다보니 자기혐오에까지 빠지게 만드는 불면증.
    잘 참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제는 솔직히 많이 힘들었다.
    남자친구의 작은 무배려가 미칠 것 같은 분노를 일으켰다.
    사소하지만 끝내 고쳐지지 않는 무배려, 무자각...
    불면으로 인한 극도의 불안감과 초조함에 분노까지 겹쳐
    얼굴에는 종일토록 미소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산책을 나섰다.
    투표를 마치고 천원샵에 들러 다육이와 싸구려 잡화를 멍때리고 구경하는데
    저쪽에서 남자 노인이 한 명이 다가오더니 나와 자기밖에 없는 진열대 사이 공간을 지나갔다.
    내 왼쪽 엉덩이를 치면서.
    그냥 손을 흔들었을 뿐인데 우연히 내 몸에 닿은 걸까?
    굳이 그 좁은 길을 통과하다가, 하필 내가 있는 위치에서???
    순간, 눈앞의 진열대에 걸려 있는 식칼이나 주방용 가위가 눈에 띄었고,
    그 손목을 OO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또 바보같이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못했다.
    태연히 액자를 고르고 있는 그의 손을 뚫어지게 응시했을 뿐.
    전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혹은 인도에서, 혹은 횡단보도 앞에서, 혹은 골목길에서, 혹은 버스나 전철 안에서, 혹은 회사에서.
    혹은 행동으로, 혹은 말로.
    모두 대낮에 일어난 일이고 나는 늘 그렇듯 노출된 곳 없이 옷을 갖춰입은 상태였다.
    신체 특정 부위에 남의 손이 닿는 기억.
    그때 상대가 여자인 적은 없었다.
    늙은, 혹은 늙지 않은 온갖 종류의 남자였을 뿐.
    나는 곰탕집 사건의 진상을 모르지만
    여성의 주장에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사실을
    많은 남자들이 ‘너무나’ 모른다는 점에
    절망했다.
    그래, 당해보지 않으면 모르니까.
    고통은 개인적인 거니까, 철저히.

    불면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저 하루이틀 잠을 좀 덜 자 피곤한 것, 주말이면 충분히 보충할 수 있는 일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괴로움은 더 개인적인 것이 되고
    정서는 고립된다.
    결국 우울증의 핵심은 외로움 아닐까.
    무력감도 외로움 때문에 증폭된다.

    사려고 들고 있던 물건을 진열대에 그대로 올려놓고

    노인의 손목을 하수구에 던져버리는 상상을 하며 천원샵을 나와
    안양천변을 하염없이 돌고 또 돌았다.

    저녁에는 <응답하라1988>을 봤다.
    익히 알고 있지만 본 것은 어제가 처음이다.
    이런 드라마라도 보면 조금이라도 잠이 올까, 하고.

    결과는 그냥...그랬다.
    자기 직전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을 읽었는데
    저자의 광신도 아버지와 폭력적 오빠에게 내 개인적인 분노를 투사해서
    코르티솔 수치가 급증한 건지...
    미칠 것 같은 감정의 기복을 조절할 수 없다며
    남자친구에게 문자로 SOS를 보냈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았지만 역시나 답은 없었고
    나는 힘겹게 잠을 청했다.

    그리고 오늘,
    뭔가에 눌린 듯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역시나 간밤의 잠은 형편 없었다.
    사람의 손목을 자르는 상상이나 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화훼단지가 너무 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코로나 시국.
    결국 발길이 향한 곳은 다시 다이소였고
    분갈이용 용토를 사서 작업실에 갔다.
    그리고 한참을 일주일 전에 산 만세선인장 분갈이하는 데 몰두했다.

    오후에는 예상치 못하게 언니가 작업실에 찾아왔다.
    불면증으로 예민해진 내가 걱정된 모양이었다.
    결국 블로그 글은 이제서야 쓴다.
    원래 오늘은 마음을 가다듬는 글을 쓰고
    글에 첨부할 그림도 그리고 싶었다.
    언제나 내게 위안을 주는 화초들을 수채화 느낌으로 완성하고 싶었다.
    하지만 유튜브에서 아이패드 그림에 종이질감 내는 법 찾느라 시간만 낭비하다가
    겨우 사과 세 개를 그렸다.
    사과 세 개...ㅎㅎ

    머릿속으로는 누군가의 손목을 생각하며
    손으로는 천진난만한 아이나 그릴 법한 아기자기한 사과를 그린다.
    인지부조화..아니 정서부조화인가.
    잠 못 잔 다음날이면 터질듯 욱신거리는 좌뇌처럼
    이 부조화가 언젠가 폭발해버린다면
    나도 조금은 편해질까, 아니면...

    이제 조금 있으면 다시 밤.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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