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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잡감
    골판지 2017. 5. 4. 02:17
    우연히 CD를 발견하고 보게 된 일드 <연문>.
    언니 말로 줄거리와 캐릭터가 아주 병맛 같다기에 원작자가 누구일지 궁금했다.
    1화를 다 보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원작자 이름이 눈에 띈다.
    렌조 미키히코(連城三紀彦).
    이 이름은 내게 구면이다.
    전에 언니가 구마모토 여행을 다녀오며 <회귀천 정사(戻り川心中)>라는 단편집을 선물로 사다줬는데
    이 단편집 작자가 렌조였다.
    사전 없이 한 페이지도 넘기기 힘들었던 그 난해한 문체의 단편들을
    나는 전 남친과 헤어진 날 읽었다.
    8년을 함께 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에서 뒹굴거리며 '고작 소설에' 몰두했었다.
    울부짖다가, 밤거리를 정처없이 헤매다가, 분노에 휩싸여 밤을 지새다가 하는 식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는 그 후에 찾아왔다.
    2008년의 일이다.
    소설 한 편 한 편 줄거리는 세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단히 탐미적이었고 일본문학 특유의 니힐한 분위기가 짙게 느껴졌다.
    언니는 일본어를 모르므로 단편집을 고른 것은 언니의 판단이 아니었을 것이고,
    드라마 <연문>도 원작의 스토리가 아니라 순전히 주연 배우 와타베 아츠로를 보기 위해서였을 테니
    나까지 이어진 언니와 렌조의 인연이 재미있다.
    사실 인연이라고 하기에는
    개인적인 그 어떤 것도 없지만
    사랑을 잃던 날의 기억 속에 그의 소설이 각인되어 있어서인지
    왠지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야후재팬에서 렌조에 대해 찾아보니 몰년월일이 나온다. 2013년 10월 19일.
    아버지 가신 날과 열흘도 차이 나지 않는다.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의 전 여친은 시한부 육 개월을 선고받은 것으로 나온다.
    아버지는 암 선고 후 넉 달을 보내고 가셨다.
    렌조는 2009년 발병했다고 하니 사 년 정도 투병한 셈이다.
    살아있는 사람과의 만남이 종지부를 찍을 땐
    미칠 듯한 격정에 휩싸였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마음은 자꾸만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내어
    숱한 불면의 밤을 보내게 만들었다.
    생과 사가 갈리며 만남이 종지부를 찍었을 때는
    당장 내 눈앞에 일어난 일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부모를 먼저보내는 것이 자식된 자의 순리일지는 모르지만
    정신과 육체를 가진, 내가 '살아있기' 전부터 그때까지 한 순간도 빼먹지 않고 줄곧 '살아있던' 존재가 진정한 의미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이 계(界)에서 영영 퇴하기로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작위적이고, 그저 불가해할 뿐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오늘, 아니 어제 온종일 방 정리를 하면서 여기 저기서 튀어나오는
    예전 사진, 글들을 맞닥뜨려야 했다.
    간혹 쓰라린 감정을 일시적으로 소환하기도 하는 그 '추억' 속에서
    전과 다르게 나는 제법 과감하게
    버릴 것을 골라냈다.
    한때 내게 퍽 의미 있었고 앞으로도 절대 그 존재 자체가 지워지지는 않겠지만
    지금 현재 함께 하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
    나는 여전히 많은 자리를 할애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바지런히 가위질하고 돌아보지 않고 휴지통을 비웠다.
    지금 나와 함께 하는 이들에게도 충실하지 못하고 있는데, 하며.

    모두 다 간다.
    제아무리 소중했던 사람도.
    아무리 뜨겁게 진실인 양 하는 사랑도.
    그것이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살아있다는 상태 자체가 일종의 환각 내지 허상이라서, 겠지만.
    지금 이 순간 함께 살아 곁에 있어주는 이들,
    그들과의 추억은 오로지 지금뿐이다.
    과거를 기억할 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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