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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
    보고 듣고 읽은 것들/활똥사진 2015. 10. 18. 00:20

     

     

    1.
    아이 둘을 키우며 학교 선생님을 하는 고교 동창이 있다.
    결혼을 일찍 해서 아이들도 내 동창들 아이들 가운데 가장 큰 편이다.

     

    "너가 애들 키우느라 고생은 많지만 대신 제일 먼저 다 키울 테니
     고생도 네가 제일 먼저 졸업할거야. 우린 언제 따라간다니?"

     

    이 정도가 그녀가 육아로 힘들어할 때마다 다른 친구들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공치사였다.
    그리고 그 알량한 위로는 다음과 같은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단박에 무색해지곤 했다.

     

    "노노... 부모의 책임에 졸업이란 없더라. 
     평생, 그러니까 죽는 그 날까지 아이들은 내 책임이자 애프터서비스 대상이란 거지.
     당장 우리들 스스로를 생각해봐도 그래.
     우리도 이 나이에도 아직까지 어떤 식으로든 부모님 그늘을 못 벗어나고 있잖아?" (일동 뜨끔;;;)

     

    여기서 친구가 말한 '부모의 책임'이란,
    그저 아이들을 건강하고 건전하게 키울 양육의 책임뿐 아니라
    그 아이들이 커서 주변이나 사회에 미칠 수도 있는 부정적 영향에 대한 책임까지 의미한다는 걸
    얼마전 그녀와 나눈 조금 심각한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친구는 둘째 아이의 남다른 성격이 고민되는 모양이었다.

     


    2.
    며칠 전 한 아파트 단지에서 길고양이들을 돌봐주던 일명 '캣맘' 아주머니께서
    철없는 초등학생들이 옥상 위에서 던진 벽돌에 머리를 맞아 즉사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용의자가 초등학생이라는 얘길 듣자마자 내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나온 소리는
    '아니 부모가 대체 가정교육을 어찌 했길래...' 였다.
    담임선생님들도 전혀 예상 못할 정도로 평범한 아이들이었다는데도,
    일단 비난의 화살이 가장 먼저 가서 꽂히는 대상은 그 부모,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그 중에서도 '엄마'가 되기 십상이다.
    옛날 교실 벽에 종종 걸려있던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라는 액자 속 글귀처럼
    생물학적으로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은 남성 분만설을 동원해가며
    사회는 출산과 육아에 있어서 남성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려 하지만
    어쩐지 현실 속에서 육아와 관련된 책임, 특히 '가정 교육' 따위에 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남성의 비중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다.

     

     


    3.
    그저께 본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삐걱거리는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자 여행가로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만남으로 갖게 된 아이에게 애착을 느끼지 못하는 엄마는
    아들과 함께 하는 일분일초가 버겁고 고단하기만 하다.
    아들은 자신을 거부하는 어미에 대한 증오를 태내에서부터 학습이라도 한 듯
    아이 때부터 믿을 수 없이 집요하고도 소름끼치는 눈빛으로 어미를 냉소하고 질근질근 짓밟는다.
    중간에 아버지가 있지만 그저 투명인간일 뿐.
    아들이 쏘아대는 화살은 아버지라는 공기를 지나쳐 어머니라는 과녁에만 무수히 꽂히고, 또 꽂힌다.
    아들의 증오는 편집증적인 애정의 다른 면이었을까?
    아니면 그 어떤 이유도 필요하지 않은 그저 사이코패스 성향의 발산이었을까.
    아들은 어미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존재를 하나 하나 부수어버리고
    끝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짓에 이르지만 단 하나, 어머니 그녀 자신만은 살려둔다.
    퀭한 눈과 움푹 들어간 뺨, 해골같은 껍데기 속 그녀에게 아들이 숙제처럼 남긴 것은
    인간 백정을 낳은 데 대한 원죄를 십자가처럼 짊어진 채 속죄하듯 숨죽여 살아가는 것뿐.

     

    이 스산하기 그지 없는 영화를 보는 내내 두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오로지 어머니만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는 아들의 끝모를 증오의 원인과
    부모라는 존재의 책임 범위에 대해서.

     

    어미는 아들의 탄생을 반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모른척하지도 내팽개치지도 않았다.
    서투르고 버겁게나마 그녀 나름대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본다).
    그런데 왜...어머니를 갈구하는 아들의 표현방식은 그토록 가학적이어야 했는지?
    이런 질문에 명쾌한 답변이 있을 리는 없고...
    그저 남들보다 애정이 좀 덜한 어머니에게 남들보다 훨씬 예민하고 편집증적인 아이가 태어나면
    -그리고 그 아이가 사내아이라는 최악의 조합일 경우-
    (일반적으로 남성의 감정, 특히 분노 조절 능력이 여성보다 취약하므로)
    그래, 저런 비극도 있을 수 있겠지, 하고 스스로를 수긍시킬 뿐.
    물론 그 수긍 자체도 그런 모자관계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수긍하는 것이지
    그런 아들의 성향 자체를 이해하고 무조건적으로 용인할 수는 없으며 그럴 생각도 없다.

     

    한편 두번째 의문, 부모의 책임 범위에 대해서는 생각이 좀 더 복잡해진다.
    캣맘 사건처럼 범행 주체들이 아직 어릴 경우 당사자들은 직접 형사 처벌을 받지 않고
    그들의 부모가 책임을 지게 된다고 들었다.
    이번 건의 경우 민사상 책임에 국한되겠지만, 어쨌든 어린 자녀에 대해서는
    아직 양육이 완료되지 않았으므로 그 부모에게 죄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런데 범행 당사자가 성인이라 직접 죗값을 치른다고 해도
    그 가족, 특히 부모는 자식이 저지른 죄로부터 사회적으로 자유롭기 힘들다.
    우리는 다 큰 성인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도 종종 '저런 악마 종자를 낳은 게 누구냐'며
    상상 속에서 그 혹은 그녀의 부모를 추적하곤 하니까.
    하지만 여기서 입장을 바꿔
    누가 나의 비행이나 악행을 빌미로 내 부모를 욕한다면
    나는 수긍할 수 있을까.
    어떤 때는 나도 내 속을 모르겠는데
    내 부모가 '당신 속으로 나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저지른 악행의 짐까지 함께 져야 하는 걸까.
    진다면 어디까지...?

     

    부모자식 사이를 우리나라에서는 '천륜'이라고 한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천륜(제 부모와의 천륜과 자식과의 천륜) 중
    현재 전자만 가지고 있는 나는
    후자의 경우가 갖는 무거움을 피부로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
    그저 상상할 뿐.
    하지만 역시 상상으로 다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지
    아들의 성격을 자신이 평생 안고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던 동창의 표정이
    그저 아득히 느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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