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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티븐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보고 듣고 읽은 것들/책 2018. 5. 28. 00:06


    글쓰기 책은 어지간해서 읽지 않는다.

    몇 년 전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한 권 산 적은 있지만 교재라 어쩔 수 없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글쓰기 책을 발견하면 들여다보기도 하지만 

    사거나 빌리지는 않는다. 

    유명 작가의 책이면 더욱 더 그렇다. 

    이유는 간단하다. 

    '글쓰기=생각하기'고,

    '생각하기'에 관한 책을 사는 건 어딘가 이상하니까.

    글쓰기의 기초적이고 일반적인 방법-가령 맞춤법이나 문법, 논리 전개 방식-이라면 

    학교에서 대강 배웠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더 살을 붙여 나가는 것은 쓰는 이의 지성과 논리적 사고력, 인격이 할 일이지,

    세부적인 글쓰기 요령 몇 개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유명 작가의 글쓰기 책을 보고 글을 써 봤자 절대 그 작가와 같은 글이 나오진 않는다. 

    몇 개 자잘한 스킬을 배우고 스타일을 얼치기로 흉내낼 수는 있어도

    그의 사고 방식을 내 머리 속에 이식할 수는 없다. 

    그러려면 글쓰기에 관한 책이 아닌, 그가 쓴 다른 책을 읽어보는 편이 낫다. 


    스티븐 킹(이하 '킹씨')의 '유혹하는 글쓰기'도 워낙 유명한 탓에 알고는 있었지만

    딱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저자의 자서전적인 내용이 반 이상이다'라는 서평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 서평을 발견하자 그때까지 별 관심이 없던 킹씨의 삶,

    그가 어떤 책을 읽었고 어떤 글을 썼으며 어떤 일을 하며 살아왔을지가 

    이상하게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마침 요 몇 달 <뉴요커>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는 그의 단편소설 두 편을 사전 찾아가며 영어로 읽으면서

    킹씨에게 나 혼자 친근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러저러 해서 지난주에 발급받은 '화요일 ebook 쿠폰'은 킹씨의 책을 사는 데 쓰게 되었다. 


    서두가 길었는데(킹씨가 본다면 한숨을 푹푹 쉴 노릇)

    결론부터 적자면-이런 결론이 너무 뻔해 분할 지경이다만-재미있다!

    책은 총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첫번째가 '이력서(자서전적 내용)', 

    두번째가 '연장통(문법, 어휘 등 글을 쓰는 데 필요한 도구에 관한 부분)', 

    세번째가 '창작론(소설쓰기의 실제?)'에 해당한다. 

    물론 '이력서' 부분이 가장 재미있었다.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형 밑에서 경제적으로 비교적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낸 이야기며

    일찌감치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잡지사에 글을 투고하면서 받은 숱한 거절쪽지 이야기,

    성인이 되어 영어 교사를 하면서도 생활비가 부족해 세탁소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한 이야기 등

    작가로서 성공하기 전까지 킹씨의 고군분투가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특히 생계를 잇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다. 

    얼마 전 '회색인간' 등의 단편을 통해 우리 문단에 혜성같이(!) 등장한 김동식 작가,

    혹은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가 떠오르기도 했다.

    원래 타고난 이야기꾼인데 산전수전공중전 겪으며 이야기가 더 풍부해지는 것인지

    사람이 누구나 경험이 많으면 자연스레 할 이야기가 많아지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런 류의 작가가 쓴 소설에는 확실히 상상으로는 구축하기 힘든 리얼리티가 있고 소재의 폭도 무척 넓다. 

    개인적으로 이런 소설이 상상력이나 심리 묘사에 주로 의존하는 소설보다 잘 읽힌다. 

    오랜 무명 시절을 거쳐 나온 킹씨의 첫 장편 히트작 <캐리>도 

    아르바이트로 궂은 일-여학생 샤워실에서 녹 제거하기-을 하러 들어갔다가

    생리대 자판기를 처음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쓴 것이라 한다. 

    하지만 소설의 소재인 왕따 당하는 여학생과 그녀의 초경이 킹씨가 잘 아는 세계가 아니라 

    생각처럼 잘 써지진 않았던 모양인지,

    쓰레기통에 담뱃재와 함께 처박힌 구깃구깃한 원고를 킹씨의 아내 태비사가 꺼내 읽어보고서야

    비로소 세상 빛을 보게 됐다나.

    <미저리> 탄생 비화도 흥미진진하다.

    부인과 함께 런던으로 여행 가던 길, 비행기 안에서 꾼 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한다.

    비행기에서 내려 호텔에 묵으면서 직원에게 글 쓸 공간을 문의하자

    한 책상으로 안내해 주었는데 그 책상이 '키플링이 글을 쓰던 책상'이었다나.

    여기서 끝이면 그냥 '유명인과의 인연이 깊은 책상이네'하고 끝이었겠지만

    킹씨가 글을 쓸 만큼 쓴 뒤 감사 인사를 하고 떠나려 하자 

    직원이 '사실 키플링이 그 책상에서 글을 쓰다 뇌졸중으로 죽었다'는 말을 덧붙였다니, 

    과연 초대형 베스트셀러의 탄생을 예고하는 일화로 손색이 없지 싶다. 

    이런 일화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킹씨의 입담을 통해 들으니 더욱 생생한 느낌이다. 

    번역도 최근 읽은 번역서 가운데 가장 만족스러웠다. 

    다만 옮긴이가 번역하면서 유달리 신경쓸 부분이 많았을 것 같다. 

    가령 '부사의 사용'에서 그렇다. 

    킹씨가 본격적인 글쓰기론 파트에서 시종 '부사를 빼라'고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무슨 의도인지는 알겠지만 전폭적으로 따를 수는 없는' 부분인데,

    아마 통번역 하는 사람이라면 대개 내 생각에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통사 구조가 다른 두 개 언어 사이에서 번역 작업을 하다 보면 

    출발어에는 없는 성분을 도착어에 추가하거나 반대로 삭제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출발어에서는 '술을 들이켰다'고 했는데 도착어에 '들이켜다'에 해당하는 표현,

    즉 '(술을) 단숨에, 마구 마시다'라는 뉘앙스가 모두 담긴 하나의 동사가 없거나 떠오르지 않을 때,

    '단숨에', '마구' 같은 부사를 써서 동사 '마시다'의 어감을 보충해 줘야 하는 것이다. 

    킹씨도 부사가 '지구상에서 멸종시켜야 악의 축' 정도로 심하게 생각한 것은 아닐 테고 '필요악'이라고 보는 정도겠지만

    옮긴이 입장에서는 '원서에 없는 부사를 번역하면서 내가 혹 추가하게 되지나 않을까'하고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 밖에도 소설은 인위적인 노력으로 다듬고 꾸며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딘가에 묻혀있는 것을 그저) 발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나

    '인물을 만들어놓으면 어느 순간 그가 혼자 살아서 돌아다닌다'라는 일종의 등장인물 방목형(?) 창작론,

    혹은 플롯이나 인물보다는 상황, 사건, 스토리, 내용이 중요하다는 주장들은 

    어딘가에서 다 통하는 주장이고

    킹씨의 이 책뿐 아니라 다른 작가들도 다른 데에서 많이 하는 말 같다. 

    저작권 대리인에 관한 내용도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고 있었는데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당장 내게 필요한 부분은 아니라 패쓰...

    마지막으로 킹씨는 이 책을 목하 집필 중일 때 큰 교통사고를 당해 이후의 집필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을 회고하고 있다. 

    책이 처음 나온 게 90년대 후반이고 한국에는 2000년대 초반에 번역되었다고 하니

    대략 20년 정도 전의 일이다. 

    사고 후 '질적인 면'에서 얼마나 작품활동에 영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이제는 큰 영향이 없기를. 

    (연세가 적지 않아 힘들 수는 있지만)


    두서없이 적었지만 결론은 아무튼 재미있었고,

    글을 써보고 싶은 욕구가 마구 샘솟는 건 아니지만

    몇 가지 작은 팁들은 나중에라도 써먹어 볼 수는 있겠다 싶다. 

    (애증의 부사...줄이긴 줄여야겠지)

    본문 속에 등장하는 많은 다른 작가들의 작품 중에 이제부터 읽어봐야겠다 싶은 것들도 있었고

    아, 놀랍게도 킹씨가 여러 차례 언급하는 스트렁크와 화이트의 <문체 요강>이

    재작년에 내가 삽화에 끌려 샀던 <글쓰기의 요소>라는 걸 알고 좀 놀랐다.

    (국문 제목은 '글쓰기~'이지만 영작문에 관한 책이고 원제는 <the Elements of Style>이다. 당연히 한글 글쓰기가 아닌 영작문에 참고가 될 게 있을까 해서 샀다. 물론 그 뒤 안 읽었지만. 그런데 킹씨같은 대작가도 이 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니 책 뒤로 새삼 후광이 보인다.)

    오늘 이렇게 장황하고 두서도 없는 글을 남기며 살짝 자괴감이 들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 책 읽었음' 이상의 의미가 없는 말 그대로 독후감이지

    제대로 된 서평은 아니니 뭐,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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