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일본에서 워킹생활을 할 때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잃어버린(도둑맞은) 적이 있다.
몇 달 간 우동집에서 일하고 받은 보수에서 생활비를 제하고 남은 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금액도 아니지만
당시 내게는 타국에서 일해서 모은 전재산(ㅎㅎ?)이었고
더군다나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바로 며칠 뒤 석달치 방세로 내야 할 돈이었기 때문에 무척 절망했었다.
한국에서 준비해온 비상금도 계좌가 묶여 사용할 수 없었다.
알바하는 곳 라커룸에서 지갑을 통째로 도둑맞으며 현금카드까지 분실했는데
일본에서는 재발급이 안됐기 때문이다.
새로 시작한 알바 때문에 미리 사 둔 전철회수권 10장 외에
단돈 1엔 한장 수중에 없는,
말 그대로 無일푼 상태였다.
그래도 가만 있을 수는 없어
밤새 울어 퉁퉁 부은 얼굴로 알바를 하고 왔다.
일단 출근을 하면 그래도 일하느라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는데
일이 끝나자 또다시 우울함이 밀려왔다.
집에 가봤자 전기도 가스도 수도도 끊겨 있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전에 살던 입주자들이 공과금을 떼어먹고 도망간 집에
아무것도 모르고 세를 든 것이다...-_-;;
너무 추워 어떤 날은 코트를 입고 잠이들기도 했다.
자다가 입은 안 돌아갔지만; 속으로 수도 없이 이런 생각을 했다.
'오란 사람 하나 없는데 뭐하러 여기까지 와서 이 dog고생인지;;'
아무튼
알바를 마치고 신주쿠역 남쪽 출구를 나와
그 냉골방으로 돌아갈 생각에 멍하니 정신줄을 놓고 있는데
어디선가 구슬픈 음악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가끔 사당 지하철역에서 공연을 하던
남미쪽 전통음악 그룹이 거기서도 연주를 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기에 앞서 주책맞게도 참았던 눈물이 다시 왈칵 터져나왔다.
그냥 들을 때조차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곡들이었는데
내꼴이 그 모양이었으니 ㅎㅎ
2월말이라 날도 추웠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지지리 궁상이었다.
집 생각이 난 김에
수신자부담으로 전화를 해보니
엄마는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고 난리셨지만
있는 거라곤 일본 오면서 끊은 오픈비행기티켓 뿐 공항 갈 차비조차 없었고
아빠는 '어떻게든 버텨보라'고만 하셨다. ㅎㅎ
평상시 아버지 말씀 참 안 듣는 편인데;;
그때만큼은 알 수 없는 오기가 생겨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귀국할 때까지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살았다'
방세는 집주인에게 사정해 외상으로 달아놓고(?)
생활비도 룸메한테서 빌려쓰며
돈을 갚기 위해 알바를 두탕씩 뛰느라
매일같이 아침 8시에 집에서 나가 새벽 1시에 들어왔다.
알바 두 개의 쉬는 날이 서로 달라 한번도 하루종일 쉰 날이 없다.
아침에 식빵 한쪽 먹는둥 마는둥하고 나가
롯뽄기 번화가에 가판대를 차려놓고 한국도시락을 팔고
(신고가 들어와 가판대 끌고 쫓겨나기도ㅠㅠ;;)
남은 도시락이 있으면 그게 그날 점심이었다.
그러다가 오후시간부터 밤 12시 반까지 초밥집에서 일하며
저녁도 역시 주문도시락으로 때웠다.
사정을 모르는 초밥집 동료들은 종종
'남상은 왜 그렇게 악착같이 일을 해? 돈 모아서 집에 보내?'하고 물어왔다.
당시 알게 된 한 일본인 친구는
지금도 만나면 그때 내 얘기를 하곤 한다.
오전 알바가 오프인 날 만나서 같이 놀다가도
점심을 먹고나면 우울한 얼굴로 오후 알바를 뛰러 가는 내 모습이 안타까웠단다. ㅎ
어떻게 보면
일만 하며 살았던 무미건조한 나날들이었지만
그만큼
지금까지의 내 삶 속에서 드물게 밀도가 높았던 때이기도 했다.
(이 말은..귀국해서는 워킹 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게으름뱅이 생활로 돌아갔다는 뜻이기도 함 ㅋㅋ)
그래선지
이후 뭔가 조금이라도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이 짧았던 한때가 생각난다.
워킹 일정을 마치고
악착같이 번 돈을 고스란히 인출해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비행기 안에서도,
빨간코트에 청바지, 낡아빠진 운동화 차림으로
청승맞은 음악 소리에 한숨이나 푹푹 쉬던
2003년 2월 어느날의 내 모습이 떠올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바로 어제까지의 일이 추억이 되는 순간이었다.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흐르지만
그 안의 알맹이들의 밀도는 일정하지 않은 것 같다.
오늘은
학교의 공식적인 학사일정이 끝나는 날이었다.
마지막 시험을 보고 사은회에도 참석했다.
그리고 집에 오는 길...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이며
또다시 그때 그곳에서
무일푼으로 수신자부담전화 버튼을 누르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된다.
내나라의 따뜻한 내방에서 삼시세끼 챙겨먹으며
호강하며 한 공부인데
뭐가 그렇게 힘겨웠길래...???라고 누가 물으면
대답할 도리가 없다. ^^;;
게다가
등록금만 엄청 까먹었지 졸업은 요원한 상황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래, 공부도 별로 열심히 안 했다.ㅎㅎ;;
그런데도 가슴을 스치는 이 느낌은 뭘까.
공부보다 다른 일들 때문에 더 지치고 힘겨웠던 2년,
그 중에서도 특히 마지막 학기..^^..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할 수는 '결코' 없지만
적어도 후회할만큼 잘못한 것도 없었노라고 나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과거의 어느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결국 나는 나일 터.
달라질 것도, 뒤돌아 볼 필요도 없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면
오늘의 나를 또 어떻게 기억하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은
시원섭섭, 그리고 약간의 우울...
이게 지금의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