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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런 번역은 좀, 아니다.
    골판지 2013. 5. 26. 20:17

    존경하는 재일교포 저자의 강연이 며칠 후 국내 한 대학에서 있다길래

    문의해본 결과 강연은 해당 학교 재학생만 들을 수 있다고 한다. .

    아쉬운 마음에 서점에서 그의 책의 최근 번역본을 찾아봤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번역이 ‘그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옮긴이는 국문과 출신에 일본 유학 경험도 있고

    지금은 국내 모 유명대학에서 국어 관련 강의도 하고 계신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타이틀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 문제는,

    이 분이 얼마전 편집인들이 뽑은 최고의 번역가로 선정됐다는 것.

    해당 편집인들의 역량까지 의심하게 된다.

    서서 책을 읽던 그 잠깐 동안에도 자꾸만 눈에 걸리던 그 많은 어색한 문장들,

    걸러지지 않은 일본식 단어들, 이상할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이중부정 등이

    설마 내 눈에만 보였단 말인가?

    해방감 넘치는 공간’? ‘도회의 현장감’?

    한국어로 해도 문법상, 어법상 틀린 것은 아니지만 지극히 전형적인 일본식 표현에

    고개를 갸우뚱한 것이 나뿐이란 말인가?

     

    언젠가 언니가 유명 일본소설가의 한국어번역본을 내게 들고 와서

    도대체 이것들이 다 무슨 말이냐고 그 뜻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옮긴이는 한국에서 일본문학 번역가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 번역가..

    그런데 그런 사람이 했다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조잡한 번역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ログハウス'를 그냥 '통나무집'이라고 하면 될 걸

    굳이 우리나라에서 잘 쓰지도 않는 표현인 '로그하우스'라고 직역한다든가,

    일본어의 '苦笑い、苦笑'가 사전에는 '쓴웃음. 고소'라고만 나와 있지만

    상황에 따라 '멋쩍게 웃다'라고 풀어야 할 곳도 있는데

    문맥과 상관 없이 하나같이 '쓴웃음을 짓다'라고 직역하여

    해당 등장인물을 아주 냉소적인 인물로 만들어버린다든지,

    한자로는 '咀嚼(저작. 음식물 등을 씹는 행위)'이라고 돼 있지만

    '곱씹다, 음미하다' 정도로 풀어써도 될 곳을 굳이 그대로 '저작하다'라고 해서

    동음이의어 '著作'와의 혼란을 초래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동음이의어 문제를 젖혀놓고 생각한다 해도,

    나는 '咀嚼'이라는 단어를, '저작작용'과 같이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아주 드라이한 문맥 외에

    일상생활에서 듣거나 말해본 적이 거의 없다)

    이런 예가 수도 없이 많았다.

    "이 사람 유명한 번역가라며~"

    언니의 다그치는 듯한 말에 괜히 내가 다 부끄러울 정도.

    일한 번역의 경우, 위와 같이 '뜻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즉 오역은 아니지만,

    지극히 일본스러운 표현을 그대로 옮겨 한국어라고 하기에 영 못마땅한 번역이 많다.

     

    그런가하면 간혹 가다 아예 시원스럽게 오역하는 경우도 있다.

    신문기사에서 종종 발견되는데, 일본어를 구사하는 한국인 기자가

    스스로 일본신문이나 인터뷰 내용 등을 번역하는 경우다.

    몇 년 전인가 피겨스케이트의 김연아 선수가 갑작스런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

    (발언 내용에 대해서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한 일본 스포츠신문이 '김연아가 唐突하게 발언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이 唐突이라는 단어를 한국 기자가 그대로 받아 번역하면서

    '김연아가 당돌한 발언'을 한 꼴이 됐다. 김연아 팬들이 발끈한 것은 당연한 귀결.

    하지만 일본어에서 '唐突'이라는 단어에는

    한국어 단어 '당돌'이 갖고 있는 이미지(되바라진?도랑도랑한?)가 없다.

    그냥 '갑작스러운'이라는 뜻이다.

    발화주체의 발언태도에 대한 듣는 이의 가치판단은 거의 배제된,

    다만 듣는 이의 감정(놀라움)이 다소 강조된 비교적 중립적인 단어다.

    가령, (아이에게) 갑자기 어떤 얘기를 터놓는 엄마에 대해 이렇게 묘사할 수 있다.

    "母は、唐突に切り出した。”

    이때에도 '엄마가 (아이에게) 당돌하게 말을 꺼냈다'는 식으로 번역하면 정말이지 곤란하다..

    그런데 동일한 한자를 다른 의미로 쓰면서 빚어지는 이러한 오역 역시

    심심치 않게 그 사례를 접하곤 한다.

     

    남의 번역문을 보고 그 번역의 질에 대해 가타부타 품평하는 것이 내 취향은 아니다.

    그런 취미를 즐길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을 뿐더러, 약간 비겁하다는 생각도 든다.

    뭐든지 처음 하기는 다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사례 중 딱히 고난이도의 번역테크닉이나

    전문지식의 습득을 필요로 하는 부분은 없다.

    그저 약간의 '경계심'과 '읽는 이에 대한 배려'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이는 번역을 업으로 삼는 이들(기자는 제외할 수 있다)에게는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이다.

    그런데 위에 나오는 사례들은 대부분 '어쩌다 발견된 실수'라기보다는

    이런 가장 기본적인 덕목을 너무나 자주, 혹은 거의 늘 잊고 있다보니

    빚어진 것들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말과 글에 대한 감각, 통번역 센스는 무척 예리하지만

    인맥이 넓지 못해서, 혹은 업계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잘 몰라서

    제 능력을 충분히 펼쳐보지 못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종종 본다.

    이런 사람들은 샘플번역 하나도 수도없이 고쳐쓴 후에야 제출하고

    그 뒤로도 몇 개월에서 몇 년을 감감무소식 속에 애태우다

    제대로 된 기회조차 잡아보지 못하고 엉뚱한 일에만 치이기도 하는데...

    초보 번역가도 아니고 이름깨나 알려졌다는 번역가들이

    그 이름값을 못하는 것을 보니 솔직히 화가 나는 것이다.

    대충 하지 말고, 다작에만 연연하지 말고,

    하나를 하더라도 좀 똑바로 하라는 것이다.

     

    휴....

    열폭을 오래 해서 그런가. 속이 쓰린 건지 빈 건지, 아무튼 갑자기 배가 고프다.

    ....

    밥이나 먹어야겠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임하지만 솔직히 내 통역과 번역의 결과물이라고

    완벽하다고는 감히 장담할 수 없다. 당연히도.

    그래도 나중에 내가 이 글을 다시 봤을 때 최소한 부끄럽지는 않기를 바라며

    위 저명 번역가들뿐 아니라 자기자신에게 보내는 心得書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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