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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서_008] 인간 해왕성이 사는 법골판지 2019. 1. 7. 19:05
업무 의뢰가 들어왔다.
늘 그렇듯이 딱히 예상치 못했던 시점에 예상치 못했던 루트로.
프리랜서에게 일이야 고정적으로 적정 보수에 적정량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러나 거의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놈의 '적정'이다.
내가 생각하는 적정과 상대방이 생각하는 적정은
같은 단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둘 사이에 태양과 해왕성 정도의 거리가 있다.
물론 내가 해왕성이고 태양은 상대방이다.
태양에게 자신을 도는 행성이야 해왕성 말고도 많지만 해왕성에게 의미 있는 항성은 태양 하나뿐이니까.
해왕성이 태양계에서 서열 여덟째로 막내라면
나는 한달 후면 이 일로 밥술 뜨고 산 지 어느덧 대략 십오 년차가 된다.
하지만 그게 다 별무소용일 때가 있으니, 네고의 순간이다.
협상은 아직도 서툴다.
전화 통화로는 짐짓 '이 정도면 내 프로페셔널함을 알겠지?'하며 있는 소리 없는 소리 갖은 너스레를 떨어보았으나
'저희가 받은 예산이 000 정도라서요' 하는 한 마디에 귀가 팔랑, 하더니
'자칭 프로'는 영락없는 '포로'가 될 뻔 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것은
그간 일하며 몸으로 깨우친 유형무형의 교훈 덕이었다.
이런 일 위험해! 도망쳐! 라는...
결국 처음 제시한 단가를 고수했다.
그래도 십오 년의 시간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나보다.
인간 해왕성에는 인간 해왕성의 룰이 있다.
태양 주변을 구르긴 구르더라도 그 속도 정도는 내가 정하자, 따위의 룰이.
그 룰을 깨닫는 데 몇 년, 그 후 실천하기까지는 더 긴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누군가의 주위를 공전하는 일 자체에서
조금씩이나마 멀어지고 싶다.
행성에서
항성이 되고 싶다.
빅뱅이 한번 더 있어야하려나. ㅎ
문맥상 별 상관은 없지만, 오늘 우연히 알라딘에서 단발머리라는 분의 서재에 들어갔다가 발견한 글이 새삼 떠오른다.
직업이 더 이상 내 모습을 규정할 수 없을 때 나 스스로 나의 삶에 구조를 부여하는 것, 나 스스로 선물받는 시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헤닝 쉐르프 -
덧> 하루 지난 1월 8일 오늘 조금 전, 문자가 왔다.예상했던대로 내 쪽에서 제시한 단가로는 업무 진행이 힘들겠다는 내용이었다.이 나이, 이 연차가 되고 보니 그 단가를 깎는다는 건내 뼈, 아니 '각막'을 깎는 행위라는 걸 알았기에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하다.눈은 소중하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