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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
    보고 듣고 읽은 것들/책 2015. 5. 9. 17:37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응용한다면, 후쿠시마 사고는, 산업이 다른 형태를 통한 전쟁의 지속임을 보여주었다.(조정환, '혁명과 재앙 사이의 후쿠시마')

    도서관에서 우연히 눈에 띄어 빌려온 책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여러나라 작가, 지식인들의 원고를 모아놓은 책이다. 아직 몇 페이지 못 읽었는데 서문부터 강렬하네...여러 번 읽은 책조차 내용을 잘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나날이 감퇴하는 기억력을 한탄하기 전에, 인상깊은 구절이 보일 때마다 여기 발췌해서 적어볼까 한다.


    -아,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으니
    오로지 희망만이 있을 뿐이니(박노해, '봄비 내리는 아침에')-


    -"일본으로 와라. 일본은 소비사회이고 관리사회이고 대중문화사회로서 현대에서 전형적인 장소였다. 그게 부서지고 있다. 모두들 동요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은 세계사가 새롭게 쓰여질 장소가 되고 있다. 너는 쓰는 인간으로서 그것을 봐라. 와서 그것을 겪어라. 그리고 사상적 전환점으로 삼아라. 거기서 같이 몰락하자"(윤여일, '몰락으로의 초대')

    윤여일씨의 글이지만 저 말 자체는 일본의 연극인 사쿠라이 다이조씨가 윤여일씨에게 한 말이다. 과연 삶 자체가 투쟁인 사람인만큼 말도 상당히 단호하고 비장하다. 나같은 사람은 같이 얘기하다보면 쫄듯. 윤여일씨도 그의 연극을 보러 갈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그 강렬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막상 보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글에 적고 있다.


    -나는 가끔, 나치를 위해 나무판자를 설계하고 어느날 슈트르트호프 수용소에서 자신이 설계한 나무판자로 만든 막사에 감금되어 버린 유대인 보관함 제작자 생각이 납니다. 우리는 자신이 만든 함정에 포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알다시피 잔혹한 죽음을 불러오는 체계에 협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가끔씩만 우리 자신의 이상에 부합하는 용기를 발견할 뿐입니다. 나는 배반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 즉 과학기술적 기회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다니엘 드 룰레, '당신은 후쿠시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


    -비관주의는 이성으로부터 생겨나고 낙관주의는 욕망으로부터 생겨난다( " )

    그래서 진보주의자들은 현실에 끊임없이 딴지를 걸고(이성), 수구파들은(보수라고 하기 싫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개발하려고만 하지(욕망).


    -핵방사능은 계급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침투하지만 핵에 대한 지각과 체험의 양식은 철저히 계급적이다. 극소수의 부자들은 핵에서 권력과 생산력을 지각하고 안전, 안심, 평화를 경험한다. 반면,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핵에서 폭력을 지각하고 공포와 불안을 경험한다. (조정환, '인지자본주의와 재난자본주의 사이에서')


    -핵에너지가 자연에서 주어진 에너지가 아니라 인지적으로 유도된 에너지라는 점, 원자력 에너지가 사람들에게 무한성장의 욕망을 조성하고 그것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에 의해 사회적으로 지탱된다는 점, 깨끗하다(청정에너지)는 이미지로 그것이 갖고 있는 위험성을 은폐해왔다는 점, 원자력의 발전이 다중을 분열시키면서 그 증오의 감정을 지배의 동력으로 삼는다는 점, 그리고 이 환상적 에너지의 안전을 위해 파놉티콘적이고 빅브라더적인 정보지배를 정당화한다는 점 등에서 핵체제는 인지자본주의가 도달한 최근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 " )


    -원자력의 방사능만이 우리를 피폭시키는 것이 아니다. 인지자본주의적인 사회관계망 속에서 제국, 국가, 자본, 남성, 백인, 학교, 교회, 과학, 기술 등 유독물질을 뿜어내는 것은 다양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일반화된 피폭의 세계'에 살고 있다. ( " )


    -일본의 고기잡이배가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에서 나온 방사선에 오염되었던 1954년의 오룡 사건 이후에, 일본에서는 거대한 반핵, 반미 운동이 일어났다. 나라 전체가, 도시들이 폭탄으로 유린되고 두 번의 핵공격을 겪었던 태평양전쟁의 폐허에서 금방이라도 회복될 것처럼 보였다. 혁명적 일본을 창출할 수 있을 사건들의 이러한 도래에 깜짝 놀란 나머지, 미국과 일본의 지배권력들은 번영하는 미래사회의 새로운 이미지를 가지고 "평화를 위한 핵"을 촉진하는 대규모의 미디어 캠페인을 계획했다. 주요 신문(요미우리), 새로 설립된 TV(일본TV)가 여기에 가담했고 몇몇 공공 이벤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캠페인 배후의 주요한 인물은, 미디어 브로커이며 요미우리 재벌의 소유자이자 CIA 스파이인 마쓰타로 쇼리키였다) (코소 이와시부로, '녹색 속에 감추어져 있는 송곳니들')


    -자본은 자본을 반성하지 않고, 국가는 국가를 성찰하지 않으며, 화폐는 에테르처럼 우리가 알고, 느끼고, 지각하고, 정념을 투사하는 모든 것들을 저 철저한 이해관계의 복마전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움직이는 모든 것, 살아 있는 숱한 것, 숨쉬는 모든 것들을 공기 중으로 휘발시키는 것은 근원적으로는 화폐다. (이명원, '끝에서 시작으로')


    -마케팅은 항상 뻥튀기 된 '언어'를 동반한다. 모든 광고언어의 본질은 '도금술'이다. 이 제품의 '척추'가 아니라 '입술'을 주목하라는 것이 광고-시의 본질이다. 만약 맨얼굴이 드러난다면, 당황한 첫날밤의 신랑처럼 후회할 수 있으나 되돌릴 수 없든, 광고-시에 낚인 소비자는 무력하다. ( " )

    광고회사에 다녔지만 수긍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_-;; 이미 족함을 알아 더 이상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에게조차 광고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사라고 어르고 달래며 때로는 협박도 한다. 광고에게도 미덕이란 것이 있다면 대체 무엇일까, 하고 예전에 생각해 본 적이 있지만 답을 얻지는 못했다.


    -산업자본주의는 노동의 '착취'를 기반으로 했지만 신자유주의는 그것의 '배제'에 기생하여 작동하는 체제다. 발전된 과학기술은 '노동 없는 생산'을 지복의 유토피아로 설정하고 있고, 그래서 임노동자로의 진입이 가장 큰 꿈이 되어버린 시대인지라, 한국의 노동자들은 '임금노동할 권리'를 끝없이 외치고 있다. ( " )

    그리고 그 임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저품격 사회이기도 하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시부야 노조무 일본대학 교수의 '사회적 비용의 전복'이라는 건조하기 그지없는 제목의 글이었다. 다른 부분들처럼 직접 쳐서 발췌하자니 조금 길어서 사진으로 올려본다(저작권에 저촉되려나;;;). 제목만 보고 '원전의 사회적 비용을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산출한 것이겠거니' 했는데, '존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뜻밖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제시된 사례 하나가 단순하면서도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를 위해 일시적으로 멈추는 차들. 그것을 보고 태어나 처음으로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있음'을 느껴 횡단보도를 좋아하게 된 사람... 횡단보도앞 일시정지는 자동차의 입장에서 보면 사소한 '비용'이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존엄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이 비용의 미지불로 인한 결과는 때로 우리의 감당 능력을 넘어선다. 그래, 환경오염, 전쟁의 가능성, 무한 성장에 대한 잘못된 세뇌, 감시사회의 출현 등 원전의 부작용은 헤아릴 수 없이 많겠지만 그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해치고야 말 것은 생명체, 특히 그 중에서 가장 나약한 인간의 존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전의 사회적 비용을 우리는 끝내 '산출'해낼 수 없을 것,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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