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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해 선물>, 정운영
    보고 듣고 읽은 것들/책 2016. 1. 1. 21:47

    종강이 가까운 한국경제론 강의 시간에 
    저는 학생들 앞에서 
    이런 연극을 했습니다.  
     
    "올해부터 학사 관리가 아주 엄격해져서 
    수강생 절반을 '의무적으로' 실격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운을 떼자 
    교실이 일순에 
    툰드라의 혹한으로 뒤덮였습니다.  
     
    그렇다고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한테 
    무조건 F학점을 줄 수도 없으니  
     
    "학점에 여유가 있어서 
    이 강의 하나쯤 실패해도 
    별 문제가 없거나,  
    가정 형편이 괜찮아서 
    한 학기쯤 더 등록해도 
    큰 지장이 없는 학생들이 
    자청해서 나서면 아주 고맙겠다"

    고 시치미를 떼었습니다.  
     
    그러고는 반장을 교탁으로 불러 
    '낙제 자원' 신청을 받도록 했습니다.  
     
    그 판에 누가 무슨 수로 
    입을 열겠습니까?  
     
    이렇게 자청하는 사람이 없다면 
    대표가 아무나 지명하라고 짐짓 
    '순교자 사냥'을 강요했습니다.  
     
    그는 얼굴이 백지로 변했고, 
    그의 눈길을 피하려는 학생들은 
    막다른 협곡에서 포수를 만난 
    어린 노루의 표정이었습니다.  
     
    불과 5분 가량의 촌극이었으나 
    학생들한테는 그 엄청난 좌절감이 
    5년의 무게로 짓눌렀을 것입니다.  
     
    "자, 한국 경제가 당면한 구조조정과 
    근로자 해고의 한 단면이 이와 같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며 연극을 파한 뒤에도,   
    죽음의 늪 같은 교실의 정적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습니다. 
     
    ....

    -정운영 칼럼집  '새해 선물' 中-

    =============================

    한해의 마지막 날이었던 어제
    배송되자마자 열일 제쳐두고 펼쳐든 책,
    故 정운영 선생의 <시선>.

    아무 꼭지나 먼저 읽어도 되기에
    별 생각 없이 그저 
    제목이 가장 시의적절해 보인다는 이유로 
    이 칼럼부터 읽다가 
    머리를 가볍게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얼른 뒷 페이지를 펼쳐 
    칼럼이 몇 년 전 것인지를 찾아보았다.

    2000년 12월 29일.

    15년 사이에 
    이렇게 달라진 것이 없어도 되는 것일까.
    혹은, '이렇게 달라져버려도 되는 것일까'.
    현실은 이미 그때보다 지금이 더
    가혹하고 암담하다.
    적어도 그때는
    성과가 떨어진다거나
    '회사에서 좀 졸았다'는 이유로
    '아무때나' 해고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명목상일지언정...

    이런 것이 '새해 선물'이라니.

    그래도 새해 첫날이라고
    하루라도 밝은 기운 좀 느껴보려 했다가
    벽두부터 또다시 생각만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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