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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일 강상중>
    보고 듣고 읽은 것들/책 2015. 2. 12. 19:28

     

    컴퓨터를 정리하다가 약 2년에 작성한 파일을 우연히 발견했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요즘 내 페이스북은 폐가 상태라 이 곳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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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1.30

     

    어제 덕수궁 옆 성프란치스코회관에서

    재일한국인 학자 강상중씨의 강연이 있다고 하기에 친구와 함께 다녀왔다.

    최근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그의 저서

    <살아야 하는 이유(원제 : についてわたしがうこと)>에 대한 강연이었고

    강연 내내 많은 부분을 공감하며 인상 깊게 들었지만

    사실 요즘 관심 있게 읽고 있는 그의 저서는

    꽤 오래 전에 역시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바 있는

    <재일 강상중(원제 : 在日 尚中)>이다.

    학교 후배에게서 빌려 한동안 책장에 꽂아만 두다가 문득 읽기 시작한 책인데

    초반에 약간의 지루함을 참자

    잔잔하지만 호소력 있는 그의 목소리에 빨려들어가듯 몰입할 수 있었다.

     

    강상중씨는 이제는 국내에도 상당히 알려져 있고

    일본 국내에서는 재일한국인 최초의 도쿄대 교수이자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인기 저자,

    TV 뉴스 등에도 종종 등장하는 유명 저널리스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타이틀만 들었을 때에는 사실 그에게 그다지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아사히신문계열의 시사주간지 ‘AERA’에 실린 그의 고정 칼럼을 읽으면서도

    그냥 한 명의 엘리트 재일교포라는 인상이었다.

    그의 이지적인 외모에 잘 어울리는 중저음의 세련된 목소리가

    뭇 일본 아주머니들을 매료시켰다는 점이 조금 색다른 이력이긴 했지만 그것도 그뿐.

    일본 우익들의 위협 때문에 옷 속에 신문지를 넣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접했을 때에도

    '그런 일상으로 점철된 삶'이 어떤 것일지에 대한 생각보다

    우익 세력에 대한 경멸, 환멸이 내 머릿속에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사유가 거기서 더 나아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서점에서 우연히 본 그의 대표적 저서 <고민하는 힘>을 읽으며

    점차 그 삶의 태도에 주목하게 되었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3/11 동일본대지진 등

    삶의 커다란 전환점이 된 사건들을 겪으며 그가 매달리게 된 것은

    '차별과 핍박 속에 살아온 재일한국인들의 인생역정'과 같은 

    단순한 한풀이 따위가 아님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고통과 외로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삶을 왜 이토록 기어코 안고 가야 하는지?

    '살아야 하는 이유' 만큼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주제는 없을 것이다.

     

    물론 젊은 시절 인간 강상중의 내면을 가장 심하게 흔들어댄 것은 '소외'였고,

    그 '소외'의 핵심에는 그의 분열된 정체성 문제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손에 쥐고 태어나는

    국가와 민족, 가족 등, 개인의 정체성을 거의 자동적으로 구성하는 요소가

    어떤 이에게는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살짝, 아프게 다가왔다.

    (국가와 민족은 허구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고

    저자인 강상중씨 자신도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는 공동체를 꿈꾼다고는 하지만)

    <재일 강상중>에는 그런 느낌을 들게 하는 부분이 몇 군데 있다.

     

    당시에 관한 묘사 가운데 개인적으로 묘한 울림을 느낀 곳은

    그가 성인이 되어 처음 한국땅에 발을 디뎠을 때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는 어느날 서울에 있던 작은아버지의 사무실을 찾아가고 그 맞은편 다방에 앉아

    일을 마치고 저녁노을을 등진 채 귀가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이곳에도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삶이 있었구나'하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 눈뜨게 된다.

    한반도의 한국인과는 다른 시간과 공간을 부유하듯 살던 또 다른 한국인

    어쩌면 자신이 원래 있어야 했는지도 모르는 자리에 비로소 돌아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에 가까운 감동을 느끼는 모습은,

    앞서 그가 구마모토 시골에서 상경했을 때

    고도경제성장기의 초입에 들어서 흥청거리는 일본,

    그 가장 화려한 중심 도쿄에서 느끼던 소외감, 외로움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문득

    작년에 외교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일본 대학생들을 인솔하던 때의 일이 생각난다.

    대부분의 일본인 학생들 가운데 딱 한 명, 재일한국인 여대생이 있었다.

    재일교포 중에는 일본 이름을 갖고 일본인으로 사는 이도 많은데

    (강상중도 성인이 되어 스스로 한국식으로 개명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녀는 이름도 한국식 그대로였다.

    무표정한 얼굴에 말도 거의 없이 무리에 녹아들지 못하고 늘 겉돌던 그 여학생이

    거의 유일하게, 그리고 가장 격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 곳은 서대문형무소였다.

    다른 학생들이 적당히 형무소 내부를 둘러보고 나와 정원을 거닐 때,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가던 나는 문득 마주치고 말았다.

    수많은 감방이 양옆으로 죽 늘어서 있는 긴 복도의 한 쪽 구석에서

    감방 쪽을 향해 주저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고문, 인권유린 속에 죽어간 조선인들의 모습과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숨죽여 오열하던 어린 여학생은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나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쉽게 다가가지 못했고

    다른 인솔자가 그녀를 데리고 나와 밖에서 이런저런 말을 걸며 달래주려 애쓸 때에도

    먼발치에서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저 어떤 경험들이 이 친구를 복받치게 했을지 조금이나마 짐작해보면서.

    물론 그것도 아주 유치하고 나이브한 '짐작'에 불과했겟지만.

     

     

    다시 어제의 강연으로 돌아가서,

    강상중씨의 모국어는 한국어지만 모어는 일본어인 탓에 

    대부분의 강연은 일본어로 진행되고

    한국인 청중에게는 순차통역이 제공되었다.

    그런데 강연 도중 특정 부분,

    가령 한반도’나 한국사람’, ‘어머니 아버지’, ‘경상도’, ‘사투리와 같은 특정 단어만큼은

    고집스럽게 한국식으로 발음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실제 강연이 끝나고 사인회가 있을 때,

    내가 강연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하며

    '<자이니치(‘재일의 일본식 발음) 강상중>을 읽으며

    비로소 자이니치문제를 조금이나마 접하게 됐다'고 하자 그는 바로,

     "아, 재일(한국인)이요?"

    하고 또박또박 한국식 발음으로 되물어왔다.

    순간, 아차싶었다.

     

     

    무대에 서서 청중을 향해 인사하는 강상중씨를 보고

    너무 여윈 그 모습에 가벼운 충격을 받았는데,

    사인을 마치고 악수를 청해오는 그의 손은

    앙상하지만 무척이나 따뜻했고

    부드러운 힘이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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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 강상중>이라는 제목만 달려 있을 뿐 서평이라고 하기도 뭐한

    내 두서없는 글은 여기서 끝이 나 있다.

    다 쓴 건지, 더 이어 쓸 생각이 있었는지도 애매한 채로;;;

     

     

    얼마 전에는 한 일본 언론인의 한국 방문 당시 수행 통역으로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그곳에 전시된 많은 유품과 자료들 가운데 특히 일본 언론인의 눈길을 끈 것은

    각 대학교의 심벌이 새겨진 교복 단추들이었다.

    정확히는 조국의 비극을 차마 못본 척 할 수 없어 6.25에 자발적으로 참전했던

    당시 재일한국인 대학생들의 교복 단추였다.

    그 중 가장 많은 참전 대학생을 배출한 곳이 자신의 모교라서였을까?

    일본 언론인은 한동안 그 작은 코너에서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강상중씨가 처음 한국을 방문해 평범한 한국인 남녀의 평범한 일상을 바라보며

    '여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을 했듯이

    나도 '그때 이런 분들이 계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만 나는 강상중씨처럼 안도할 수는 업었다.

    6.25가 휴전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전쟁의 상흔으로 피폐해진 '조국'은 미처 이들을 신경쓸 여유가 없었고

    이들이 실제 부대끼며 살았던 나라,

    6.25 발발의 책임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일본이라는 나라조차

    살아돌아온 이들 대학생을

    자신들의 품으로 거두어들이기를

    끝내 거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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