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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의 술
    골판지 2020. 10. 12. 01:20


    요즘 내 루틴 아닌 루틴 중 하나는 ‘공간 하나 들었다놓기(?)’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미니멀리즘까지는 못 해도 주변을 좀 정돈하며 살아야겠다는 강력한 충동이 들던 참이었다.
    그 충동을 마침내 실천에 옮기는 중이라
    정신을 차려보면 집안 어느 한 구석을 딱 찍어놓고 ‘너 잘 만났다는 듯’ 들쑤셔놓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어제는 옷장(하루종일 나름 버리고 정리했지만 아직 진행중. 차근차근 더 해야 함),
    오늘은 찬장 속 아버지의 술들이었다.

    아버지는 7년 전에 돌아가셨다.
    이후 중요한 건 남기고 많은 유품을 정리했지만
    술병들은 어쩐 일인지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으로 남아있었다.
    어머니는 다정하고 살뜰한 주부이자 아내, 엄마였으나
    정리 센스만큼은...음..별 다섯 개 중에 하나...아니 좋다, 두개 드리겠다..
    하나는 그래도 젊은 시절엔 청소를 영 잊고 사신 건 아니니까. 또 하나는 딸로서 의리로...ㅎ
    아무튼 그래서 엄마방은 대체로 늘 혼돈의 카오스다. ㅋ...
    곤도 마리가 오면 한나절은 잔소리를 퍼붓고 가리라.
    그렇게 엄마방의 혼돈 속 한켠을, 아버지의 술병들이 먼지를 눈처럼 소복이 뒤집어쓴 채 차지하고 있었다,
    7년 동안.
    기어이 몇 년 더 채워 끝내주는 술맛을 보고야말겠다는 술꾼의 욕심이 우리 가족에게 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제 엄마를, 그리고 술병들을 서로에게서 해방시켜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늘의 정리가 시작됐다.

    내 정리 작업의 패턴을 보면
    문득 ‘뭔가에 홀린 듯’ 목적지 앞에 도달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계획이나 청사진 없이 ‘무작정’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개 before나 ing 사진이 없다.
    오늘은 용케 사진을 찍었는데 찬장 정리는 아직이라 술만 모아놓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꺼낼 때의 쾌감은 사라지고...
    이게 차라리 다 물이었으면...

     


    큰 단지에 든 담금주는 아직 아랫선반에 대부분 남아있는 상태.
    윗선반에 있는 것들만 꺼냈는데도
    주종도 다양했다.
    시판 술로는 국산 소주나 위스키, 청주, 북한 들쭉술과 인삼주, 중국 고량주, 몽골 보드카, 러시아 보드카, 일본 사케, 일본 위스키, 영국 위스키, 프랑스 코냑, 독일 와인에서
    직접 담근 술로는 매실주, 작약주, 대잎주, 야관문주에 온갖 정체불명 식물의 뿌리와 줄기, 열매와 잎이 둥둥 떠다니는 각종 담금주까지...
    유리창 안에 보관해 왔건만 먼지는 어디서 이렇게들 홈빡 뒤집어 썼는지.
    켜켜이 쌓인 세월의 더께를 닦아내고 하나씩 속을 비워 빈병으로 내보낼 차례였다.

    한모금이라도 마신 술이나 유통기한이 지난 발효주들은 미련 없이 개봉해서 내용물을 버렸다.
    미개봉 상태인 술들은 유통기한이 따로 없는 증류주가 많아 일단 그대로 두었다.
    (고량주와 보드카는 모르고 실수로 버리고 말았다)
    먼지가 많이 일어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도
    뚜껑을 열자마자 시금털털하고 알싸한 향이 코를 찔렀다.
    꼴꼴꼴꼴꼴...
    수챗구멍에서 피어오르는 술냄새를 하염없이 맡다보니
    나까지 얼마 안 가 독주 한두 잔 마신 듯 살짝 멜랑꼴리한 상태가 되면서
    텅 비어있던 머릿속에서 상상의 나래가 펴지기 시작했다.

    이 술을 꽤 드신 걸 보면 아빠가 이걸 좋아하셨나 보네...
    이건 혼자 드실만한 게 아닌데 많이 비어있네? 언제 누구랑 마신 걸까...

    아버지가 병 수집은 안 하셔서 남아있는 술병 중 빈병은 없고 거의 드시다 만 것이나 새것이었다.
    만년에는 주로 와인을 즐기셔서인지 위스키, 코냑 같은 양주는 개봉하지 않은 것이 더 많았다.
    가족들과 술 때문에 크고 작은 갈등을 빚으실 정도로
    아버지는 오랫동안 술과 친구에 빠져 지내셨다.
    그래선지 내 머릿속에는 아버지는 그저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술꾼이며,
    평생 술로 돈깨나 깨지셨을 거라는 단순한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비교적 비싼 술 중에 손도 안 대고 고이 모셔만 둔 것들이 많았다. 비어있는 건 주로 저렴한 술들.
    생각해 보면 비싼 술을 사오거나 드시는 걸 본 기억은 거의 없다.
    주로 밖에서 드시고 오는 편이었지만 어디 고급 바에서 양주를 기울이시는 눈치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첫째 가는 취미가 등산이었던 것이 생각났다.
    한번 골프에 도전해 보신 적은 있다.
    마침 그무렵 대기업 사장님이 된 군대시절 전우분으로부터 비싼 골프채 세트를 선물로 받아
    나까지 몇번 끌고 골프장을 다니시곤 했다.
    그렇게 좀 취미를 붙이시나 했는데 어느 날 보니 그새 발길을 끊으신 듯했다.
    이유를 여쭤보니 영 취향이 아니시더라고.
    그 빈자리를 다시 채운 것은 오래 정 붙이고 지낸 취미들-등산과 산책, 독서, 바둑-이었다. 
    하나같이 때깔 안 나고 돈 안 드는 취미다.
    술 취향과 닮아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이 집안 사람 아니랄까봐
    고급진 취향 하나 없이 그저 무던하게 사셨구나, 싶었다.

    생각을 많이 한 게 화근이었다.
    이 술들, 처음에는 정말 다 버릴 생각이었다. 내용물은 물론이고 병까지 미련없이 깨끗이.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 되지가 않았다.
    너무 멀끔하게 남아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이대로 수챗구멍으로 직행시키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친은 대뜸 자기가 마실테니 내버려두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술 자체는 그리 즐기지 않는 사람이고 하물며 위스키 같은 독주는 몸이 잘 받아주지도 않는 편이다.
    그렇다면 지역카페에서 원하는 분께 나눔해드리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다만 나야 우리 아버지 물건이고 또 돌아가신지 7년이라 이제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지만
    남들은 망자의 유품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선뜻 나서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해서 지식인에 ‘이런 걸 나눔해도 괜찮을지’ 먼저 물어보았다.
    의외로 ‘괜찮다/아니다’를 떠나 바로 가격을 언급하는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몰랐는데 중고(?) 양주 거래라는 게 은근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얼떨결에 술들의 브랜드별 시세와 인지도까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십수 년, 때로는 수십 년을 한지붕 아래 있었으면서
    나는 아버지의 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사실
    알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몰랐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술을 마시기 전과 후가 아주 다른 분이었다.
    가끔 정말 기분 좋게 한두잔 걸치고 통닭이나 어묵 따위를 한손에 든채 귀가하셨던, 극히 드문 몇몇 날들을 빼면
    나는 대개 술 마신 아버지가 끔찍하게 싫었고
    밤늦게 택시에서 내려 집에 들어오는 술취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날은 아무데나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겁에 질리곤 했다.
    떡진 머리와 몸에서 풍기는 술냄새, 풀어진 눈, 꼬부라지는 혀, 다소 위협적으로 변하는 목소리와 끝없이 반복되는 울분에 찬 주사, 다음날 아침의 숙취로 인한 짜증 등
    술과 관련된 인간의 변화는 지금도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제 성인이라 그저 '좋아하지 않는다' 정도로 덤덤히 표현할 수 있지만
    아무런 힘이 없던 어린 시절,
    술만 들어가면 완전히 딴사람으로 돌변하는 어른은 그저 '공포'의 대상, 그 자체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한밤중 술 취한 아버지와 벽 사이에 벌 서듯 서서
    뭔가 끊임없이 추궁을 당하거나 벌벌 떨며 울던 언니와 나의 모습들, 모습들, 모습들...
    많이 흐릿해졌지만 끝내 지워지지는 않는 트라우마다.
    성인이 되어 술을 마시게 되어서도
    절대로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며 필사적으로 긴장했던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의 술...

    지긋지긋했다.

    그런데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하는 자식의 일종의 클리셰 같은 것인지,
    아니면 나도 한창 술을 즐기시던 그 시절 당신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
    이제 술을 마시고 난 후의 아버지가 아니라
    술을 마시게 되기까지의 아버지, 그 상황과 기분을
    이리저리 상상하게 된다.

    어떤 날은 그저 친구들과 기분 좋게 한잔 하고 싶으셨겠지.
    어떤 날은 직장 상사의 화풀이나 질책에 또 한잔 하고 싶어지셨을 수도 있고.
    어떤 날은 안 풀리는 일 때문에 홧김에.
    어떤 날은 부부싸움한 뒤 에라 하고.
    어떤 날은 그냥 술이 땡겨서.
    어떤 날은 가을이라.
    또 어떤 날은 월급받고 기분이 좋아서...
    그런데도 한편으로 이렇게 많은 술을 그저 모셔만 둔 걸 보면
    아버지는 어쩌면 술 자체를 좋아하셨던 게 아니라
    그저 술로 풀고 싶은 어떤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닌지...
    마치 지금 내가 가끔 그러듯이.

    대개의 인간관계가 그렇듯
    부모자식간의 권력(?) 관계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해간다.
    아버지가 아버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가 지녔던 무소불위의 권위는 어느 때부턴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자식들은 어려서 소통을 통해 친밀감을 쌓지 못했던 아버지에게는 냉담해진다.
    내 세대에는 비교적 이런 집이 흔했다.
    술 좋아하시는 엄격한 아버지에게 애교 한번 부려볼 기회가 없었던 나 역시
    머리가 좀 굵어지면서 아버지 말씀은 듣고도 모른 척도 많이 했고
    명령이든 부탁이든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며 거절부터 한 적도 많다.
    특히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는
    아버지도 몸 여기저기 전과 같지 않아선지
    독주나 소주를 피하시고 술을 드셔도 주로 집에서 와인 정도였는데
    '같이 한잔 할래?' 하는 소리를 거의 번번이 퇴짜놓은 위인이 바로 나였다.
    커피도 종종 권하셨는데-왜 또 하필이면 매번 오후 5시 넘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역시 ‘됐어’, ‘안 마셔’, ‘아빠 혼자 마셔’가 내 단골 멘트였던가.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로 유명한 작가 미치 앨봄의 또다른 소설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에
    '부모는 누구나 자식에게 상처를 준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래, 아마도 그럴 것이다.
    부모도 신이 아니라 약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거기에 내 맘대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상처받은 자식도 어떤 식으로든 되갚음을 한다'.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차이는 있겠지만.
    이해하게 되는 것은 그 후의 일이다.
    그리고 후회하게 되는 것은 조금 더 나중의 일이다.
    아마도 내가 일말의 후회를 느꼈다면 그건
    내 아버지에게도 현실과 다른 꿈이 있었고
    그것이 좌절되는 순간과 사건이 있었고
    나는 그 후의 아버지의 모습만 보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다 옛날 얘기다.
    어느 집에나 있는 흔해빠진.
    그래도
    이러나 저러나 나에게 단 한 분의 아버지였기에
    그가 남긴 술병 하나하나에 이런저런 상념과 기억과 회한이 끼어들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그래도요 아빠,
    그렇게...
    그런 식으로 술을 드시면 안 되는 거였어요.
    그렇잖아요...
    뒤끝 작렬 딸내미는 중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중얼거린다.


    오늘 작업의 최종 결과.
    개봉하지 않은 양주들은 일단 근처 분들께 나눠드리거나 당근마켓에 내놓을 생각으로 따로 모아두었다.
    소주는 제사때 쓸 수 있을 것 같아 주방으로 고고.
    이제 엄마방의 찬장도 얼추 깨끗해졌다.
    단, 병뚜껑 하나 남겨놓지 않으려 했던 당초의 계획에서 달라진 점 한 가지.
    술병 두개는 자리를 보존할 것 같다.
    오래 전에 나온 저렴한 국산 양주다.
    하나는 술이 꽤 남아있고 하나는 개봉만 한 상태였던 걸 보면
    아버지는 이 술들을 그다지 좋아하시지는 않았는지도 모른다. (국산 양주라 맛이 없었나~)
    그래도 뚜껑도 안 딴 다른 술과 달리
    이 술에는 무언가 ‘아버지와 술’, 내가 모르는 둘의 이야기가 조금은 서려 있을 것만 같았다.
    촌스러운 글씨체와 레트로한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국산양주1_패스포트. '특급'위스키라고 하기엔 어딘가 익숙한 소주병 색깔.
    국산양주2_’올드’라니..이름 어쩔 ㅋ

     



    내용물을 비우기 위해 개수대에서 병을 거꾸로 기울이자
    예의 그 알싸한 냄새가 또다시 코를 찌른다.
    마신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며 생각한다.
    이 술은 언제 누구랑 무슨 이야기를 하며 마신 걸까.
    그때 아버지는 즐거웠을까, 신이 났을까, 울화가 치밀었을까, 아니면 그냥 좀 우울했을까.
    술자리가 파할 때쯤, 아버지는 이야기를 봉인하듯 뚜껑을 닫으셨을 테고
    술병 안에 고이 녹아든 그날의 목소리들은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잠시 내 주변을 맴돌다가
    이내 더이상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
    콸콸 소리와 함께 개수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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