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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반도行(09.01.31~09.02.01)걷고 쓰고 그린 것들/터벅터벅 2009. 2. 14. 01:08
친구과 함께 변산반도에 다녀왔다.
서른이 되면 함께 러시아 여행 다녀오자고 약속했던 게 언제였더라.
서른이라는 나이가 어떤 울림을 가졌길래
러시아가 우리에게 뭐였길래 그때 우리는 그런 약속을 했을까?
지금 러시아는 동양인에 대한 혐오범죄가 늘어나는 추세라던데...
무지했던 만큼이나,
다큐멘터리에서나 보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미지가
당시의 내게는 꽤나 강렬했던 모양이다.
서른하고도 한 해가 더 지났건만
친구와 나는 여전히 그때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언젠가는 가겠지 하는 막연하고도 답답한 '바람'만
가슴 속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ㅎㅎ
그래, 그건 정말이지 '바람(願)'이고, '바람(風)'이다.
변산반도는
벌써 8년 전에(아 끔찍하다ㅠㅠ) 답사반 사람들과 함께 다녀왔는데
마치 호쿠사이의 판화에서나 본 듯한
맹렬히 파도치는 바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밝은 달이 천공의 성처럼 공중에 떠 교교히 빛나던 겨울 밤바다..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그날의 날씨가 그다지 유별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전에도 그 후로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없을 정도로
무섭고, 초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알콜기운도 있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바닷물 속으로 꽤 들어가 있었다.
말리는 사람 덕분에 어찌어찌 나오긴 했지만;;
아무튼 그 강렬함 때문인지
그날밤의 각별한 추억을 떠올릴 때면
밤바다의 풍경도 배경사진처럼 세트로 떠오르곤 한다.
그 후 우리끼리 다시 가보자고 말이 몇번 오갔다가
무산되길 몇 차례.
그러다가 드디어 며칠 전,
러시아도 못 갔겠다, 피차 마음은 여러가지 일들로 무겁겠다,
에라 모르겠다 다녀오자-고 의기투합해서
아무 준비 없이 훌쩍 다시 찾았다.
일단은 동서울에서 부안으로...
그리고 부안에서 다시 버스를 탔다.
부안 버스터미널에서 핸드폰카메라로 아무 생각없이 찍은 우리의 짐...
정말 조촐하다. ㅋ
정확히 말하면 목적지는
변산반도 중에서도 원광대임해수련원이 있는 고사포해수욕장이었다.
그곳이 8년 전 정확히 우리가 묵었던 곳이기에...
하지만 '변산반도'라는 이상향(?)의 이름 하나 달랑 되뇌며 나선 우리에게는
지도 한 장 챙길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
처음엔 멋모르고 격포해수욕장에서 내리고 말았다.
그곳도 변산반도의 일부이긴 했는데, 그만 운전기사 아저씨에게
'변산반도 가려고 한다니까요' 하고 우기며 서울촌티를 냈다가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결국 다시 버스를 타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 변산반도해수욕장앞에서 내렸다.
고사포는 이 두 해수욕장 중간쯤에 있는데 그건 나중에야 알았다. ㅎ
버스를 내리니 주변은 온통 칠흑이었다.
수십미터 가면 바다가 있는 듯했지만 우선 시장기부터 달래기로 했다.
그렇게 들어간 근처 식당에서 우럭매운탕을 시켰더니
줄줄이 나오기 시작하는 반찬들...
응? 매운탕 시켰는데 고추냉이는 왜 주능겨? (절반 정도 나왔을 때 눈치보며 한방ㅋ)
알고보니 뒷자리 사람들이 모듬회를 시키면서 딸려나오는 쓰끼다시가
점원 실수로 우리 테이블로 날라져 온 건데
그걸 모르고 나오는 족족 먹어치워서
뜻밖의 횡재를 하고 말았다.
사실..눈치채고 나서도 행여나 치워버릴까
눈을 뛰룩뛰룩 굴려가며 소리없이 주워먹었다. ㅋㅋ
우럭매운탕은 매운탕대로 깨끗이 비운 것은 물론이다.
저녁을 먹고 가게를 나서며 근방에 묵을 곳이 없는지 묻자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걸어서 한 10분쯤 가면 괜찮은 펜션이 있다고 알려주셨다.
걸어서 10분...
그 흔한 네온사인, 가로등 하나 없어 밖은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라 망설이고 있자니
한 잔 얼근히 걸치신 가게 손님 한분께서
2~3분이면 도착한다고 큰소리치신다.
그 말을 믿었던 우리도 참 ㅋㅋ
사실 믿었다기보다
근처에 달리 묵을 만한 데가 없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보이는 민박 간판은 하나같이 어딘가 불안해보였다.
가게를 나와
무섭게 달리는 차들을 피해 국도변을 따라 걷고 또 걷기를 수십분..
가도 가도 펜션은 보이지 않고
대신 하늘에는
얼마만에 본 것일까.
하나, 둘인가 싶었던 별들이
고개를 들어보니 마치
이끝에서 저끝까지 박하가루라도 한움큼 뿌려놓은듯 촘촘히 박혀있었다.
어두워서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하늘만큼은 8년 전 그 하늘과 닮아있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펜션은 신축이라 비교적 깨끗하고 쾌적한 편이었다.
오두막같은 민박의 정취를 포기한 대신 편히 쉴 수는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난방을 너무 세게 틀어줘서
더위 많이타는 체질에 잠들기가 힘든 건 그렇다쳐도
수십분을 걸어오면서 바다로부터도 너무 멀어져서
8년을 오매불망 그리워했던 겨울밤바다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ㅠㅠ
그거 하나 보러 갔던 건데..쩝.
계속 걸어온 국도변과 해안선이 수평이겠지,
그러니까 펜션에서 나가서 얼마 안 가면 바닷가겠지, 하고
왜!왜! 멋대로 생각했던 걸까? 나는? ㅠㅠ
사실 주위는 너무 어둡고 시간은 없고 하다보니 별 생각이 없었다..;;
멍때리고 걷기 하나는 자신 있는 1人...
다음날.
느즈막이 일어나 바다로 향했다.
한겨울의 바닷가인데도 바람조차 별로 없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에 무리가 없었다.
역시 수십분을 걸어간 끝에 눈앞에 나타난 변산반도 앞바다.
일단 바지락칼국수로 배부터 채우고...
(전라도 까지 왔으니 팥칼국수 한번 먹어보려고 했는데
음식도 서울서 다 먹을 수 있는 것들만 먹고 왔네;;)
여기서부턴 그저 걷고, 바라본 기억밖에 없다.
화질 구린 핸드폰카메라지만 몇 장...
물이 빠지고 드러난 드넓은 갯벌.
진흙밖에 없어보이는 곳에서 아이들은 웅크리고 앉아 작은 새우와 게를 건져올리곤 했다.
이렇게 보니 쪼글쪼글한 것이 좀 징그럽네. ㅎㅎ
친구들과 함께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불가사리 한 마리. 살아있지는 않은 듯.
따개비들로 뒤덮인 바위무덤 앞 모래사장에 조개껍질로...
몰랐는데
따개비로 뒤덮인 바위에 귀를 기울여보면 '틱,틱'하는 소리가 쉼없이 들린다.
가만히 바위에 붙어있는 듯 보여도 얘네들도 먹고살려고(?) 바지런떨고 있는 건가..ㅎ
친구는 바다쪽으로 꽤 멀리 나갔던 모양인지
발부리가 온통 젖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서울 가는 길.
따끈한 캔커피 하나씩 홀짝이며 한참을 기다린 끝에
낡은 버스에 몸을 실었다.
뭐 그리 먼 곳이라고.(그나마 살짝 옆동네로 새어 버렸지 ㅋ)
와서 무슨 대단한 일들을 했다고
이곳을 다시 찾기까지 8년이나 걸렸을까?
묘하게도
8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바다 앞에서 비슷한 생각에 넋을 놓고 있었다.
썰물로 훤히 드러난 갯벌처럼
그 동안의 시간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결국 같은 곳에 와서
같은 표정 같은 시선으로 서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니
그대로인 것이 또 있었다.
지방 군소도시의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별로 없는 듯하다.
여행자의 입장에는
북적이는 대도시를 피해 도망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모두가 서울로 경기도로 빠져나간 후의 텅 빈 느낌만이 들어서
쓸쓸함을 지울 수가 없다.
부안 정도 되면 꽤 큰 지방 중소도시인데
조금만 더 활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서울 사는 주제에 생각했다고 한다면 가식일까....
그래서 행정수도 건설에도 찬성했는데
그건 뭐가 어떻게 돼 가고 있는건지?
저 갯벌들도 생산성 떨어진다고 MB가 다 간척지로 만들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등등 서울 돌아오는 길의 머릿속은 오지랖도 참 넓다. ㅎ
갯벌에서 가져와 깨끗이 씻은 고동과 조개껍데기
그렇게
여행은 끝났다.
아주 짧았던 변산반도행.
하지만
매일매일 속의 1박2일이 아닌
아주 조금은 특별한 날로
그날을 기억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