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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공지능 시대, 뭐 해먹고 산담
    보고 듣고 읽은 것들/책 2016. 3. 16. 00:11

     

     

     

    <로봇 시대, 인간의 일>

    구본권 지음, 어크로스 펴냄, 2015

     

    광고회사 사내 통역으로 일하던 시절, 어느 날 다른 부서 국장님이 짓궂은 표정으로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내 눈앞에 핸드폰을 들이밀며 운을 띄웠다.

     

     "00(), '안녕하세요' 해봐."

     "..엥? 뭐지? ~"

     ", 해보라니까."

     "(미간을 찌푸리며)..녕하세요....?"

     "(핸드폰에서)...오하요-고자이마스!(아침 인사를 뜻하는 일본어)"

     "...이게...그 통번역 앱인가 봐요?"

     "(싱글거리며)빙고! 00, 이제 어떡하냐? 얘가 앞으로 00씨 일도 다 하게 생겼어!"

     "(끄덕끄덕)아하, 그렇겠네요. 그럼 잘 됐다. 십 분 뒤 사장님(일본인) 미팅 통역은 그 폰에 부탁 좀 해도 돼요? 전 본사에 급히 연락할 게 있어서."

     "(눈 찡긋, 어깨 툭)~, 왜 이러나~. 웃자고 해본 소리 갖고~. 있다가 잘 부탁합니다~"

     

    그렇다, 젊고 장난기 많은 국장님과의 이런 대화야 피차 그저 웃자고 해본 소리였다. 그런데 농담 반이었던 이 대화가 현실이 되고 있다. 엄청난 속도로. 게다가 통번역만이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이 국장님의 일부터 먼저 '접수'될지도 모른다. 그의 업무는 예산과 타겟고객, 매체의 성격 등을 면밀히 분석, 조합해서 특정 제품의 맞춤형 광고전략을 짜는, 대단히 데이터 중심적인 일이었고 그 능력을 인정받은 그의 연봉은 사내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데...많은 데이터와 정보를 바탕으로 언어를 사용해서 이루어지는 이런 업무부터 구조조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심지어 이 대화 속 다른 등장인물인 사장님도 위험하다고? '로봇의 시대'에는 만인이 만성적인 고용불안, 아니 아예 고용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고?

     

    작년 말, 팟캐스트 방송에서 <로봇시대, 인간의 일>(이하 <인간의 일>)을 처음 접하고 든 생각이다. 다만 과학, 그것도 인공지능 같은 최첨단 분야에 대해서 '책 한 권 읽는다고 내가 뭐가 달라지겠어' 하며 반신반의했는데.. 결국 호기심을 못 이기고 읽고 말았다. 결론은, '한 권의 책' 때문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세돌과 알파고와의 세기의 대국을 평소의 나와는 조금 다른 마음가짐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서점에 가보니 이 책 말고도 사람들의 불안심리를 포착한 책들이 많이 포진해있었다. 특히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인간은 필요없다>가 눈에 띈다. 하지만 역시 <인간의 일>로 낙점. 노랑과 파랑의 산뜻한 표지 배색에 강렬하게 끌렸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고는 차마 말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내용의 깊이를 평가하기 힘든 문과의 비애 때문이라고도 못 하겠다...

     

    막상 책을 펼쳐 한동안 읽다 보니 이 책에서 말하는 '인간의 일'이란 중의적인 의미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직업, 노동이라는 의미의 '' 뿐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모든 행동'으로서의 '일' 말이다. 책 구성도 제1~3장까지가 무인자동차나 통번역, 교육 분야에서 인공지능과 IT기술이 이룩한 성취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면 제4장부터는 직업의 역사, 여가, 관계, 감정 교류, 호기심, 기억과 망각 등 인문학적인 테마가 이어진다. 각 챕터마다 다양한 시대, 학자, 주장이 등장해서 배경지식이 거의 없던 나로서는 소화하는 데 시간이 적잖이 필요했지만 사실 나열된 지식의 단편보다 더 오래 눈길을 붙잡아둔 것은 모든 챕터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철학적인 질문이다. 그 질문들은 결국 '인간만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온갖 고등한 지적 활동을 로봇이 잠식하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남겨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이냐'에 수렴된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외뇌 시대에 어떻게 새로운 방법으로 외국어를 익힐 것인가라는 물음은 필연적으로 학습의 본질과 삶의 목표에 대한 근원적 질문으로 연결된다. 어떤 기능까지 외부에 의존할 것인가. 내가 직접 배워서 몸에 지녀야 할 기능은 무엇인가.(77p)-

     

    -'생각하는 존재'로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기계가 시뮬레이션할 수 없는, 시뮬레이션 자체가 무의미한 인간만의 사고 작용과 특징은 무엇일까?(242p)-

     

    -....이는 로봇이 모방할 수 없고 연기할 수 없는, 공감 과정에서 느끼는 나로부터 '분리 불가능한' 상태와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과정이다. 감정적 연기 능력을 갖추고 사람을 속일 수 있게 된 로봇은 감정적 동물인 인간에게 감정의 본질을 묻는다. 로봇이 사람의 감정을 흉내 낼 수 있다면 사람만의 감정적 본질은 무엇인가?-

     

    앞으로 뭐 해서 먹고 살까 하는 지극히 속물적인 고민 끝에 펼쳐 든 책에서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나레이션으로나 들을 법한 이런 질문 세례를 받을 줄이야 몰랐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하게도 그 일(직업)과 이 일(정신활동)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났던 19세기, 기계가 인간을 육체노동에서 상당부분 해방시키고 난 뒤 지식서비스산업 종사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일이 정신활동과 상당히 겹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일터에마저 인공지능, 로봇이 비집고 들어오려 한다. 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면 이 역시 완전히 낯설기만 한 풍경은 아니다. 나도 일, 특히 번역일을 하면서 '어디까지가 내 머리가 한 번역이고 어디까지가 검색엔진이 해준 번역일까'를 생각하며 쓴웃음 지은 적이 몇 번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시대에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느냐고? 예상했겠지만, 거기에 대한 답은 없다. 다만 조언은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답안지는 없고 문제 한 바닥에 힌트만 여러 개 달린 '이상한 문제집'인 셈이다. 몇 가지 조언과 자신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답을 찾아가는 것은 호모'사피엔스'인 우리의 몫이다. 이세돌처럼 IQ 155가 아니라도 아직까지는 이 정도 생각은 우리 스스로 하는 수밖에 없다.

     

    순서가 뒤바뀌었는데, 철학적 질문 뿐 아니라 최신 기술 경향이나 역사 변천 과정도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꽤 충실히 소개되어 있다.(주로 제1~4). 무인자동차와 통번역 분야, 교육 분야에서 이미 가시화하고 있는 인공지능 기술에 관한 부분은 특히 흥미롭다. 특히 통번역, 외국어 분야면 심지어 내 밥그릇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인데도 꼭 부정적으로 읽히지만도 않는다. 한때 선망의 직업이었던 항법사나 지식의 대명사였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과정이 기술된 부분도 내용 자체는 분명 쓸쓸하고 서글펐지만, 지식과 직업 세계의 역동적인 흥망성쇠가 모든 것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으므로 꼭 비관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물론 불안이 비관과 절망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마지막 장에서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만.

     

    이미 여러 매체에서 다룬 책인데 이렇게 굳이 나까지 나서 구구절절 끼적여 보는 것은 '좋은 책은 더 소문내자'는 생각 때문이다. 이 분야에도 양서는 많겠지만 해당 분야에 정통한 한국인 저자가 국내 일반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써서 그런지 사례가 풍부하고 글도 번역투가 아니라 가독성이 높은 편이다. 다만 사례들이 너무 서양의 시각, 서양의 연구 성과 중심이라는 생각은 드는데, 사실 그것도 저자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아쉽지만 동양에 아직 그런 연구의 성과가 덜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한 다큐멘터리에 하와이에 사는 한 미국인 농부가 소개된 적이 있다. 그는 한때 뉴욕에서 잘나가던 변호사였지만 늘 쫓기는 듯한 생활에 염증을 느껴 어느 날 아내와 함께 하와이로 귀촌해 소박한 삶을 살고 있었다. 행복한 삶의 조건이 무엇이냐는 PD의 질문에 싱긋 웃으며 그는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어디'에 살 것인가?

    -둘째,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셋째, 그 일을 '누구와' 할 것인가?

    이제 머지않아 우리는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의 어딘가에는 '로봇'이 끼어드는 사회에 살게 될 모양이다. '그때 어떤 세상에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를 고민해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라면 <인간의 일>은 꽤 성실한 입문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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