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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구의 수명
    보고 듣고 읽은 것들/책 2017. 8. 27. 02:19


    며칠전 사놓고 못 읽었던 <숨결이 바람될 때>를 읽었다.
    전도유망했던 젊은 남성 신경외과 레지던트 폴 칼라니티가 어느 날 암선고를 받고 기록하기 시작한 수기였다.
    인생의 의미, 가치, 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항상 고뇌하며
    한편으로는 명석한 두뇌에 걸맞는 야망도 갖고 있던 저자였지만
    죽음 앞에서는 초연할 수 없는 하나의 유한한 생명체였기에
    그가 부모로부터 물려받거나 혹은 키워온 모든 재능과 환경, 성취와 축복이
    읽는 입장에서는 특히나 더 허무하게 느껴졌다.

    폴은 청소년 시절을 사막지대에서 사색 속에 보낸 때문인지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철학적인 질문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의사 가족으로 이루어진 집안환경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의학을 전공하지 않고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러다가 문학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비과학적이라 판단하고
    새로이 의학에 뜻을 세워 의과대학원에 진학한다.
    이 부분은 그가 인간과 그 삶을 어떤 괸점에서 인식하고자 하는지를 말해준다.
    문학, 혹은 인문학, 예술에만 인간 본질의 모든 것을 전유하게 할 수 없는 법.
    머리 위의 '인간'적인 부분뿐 아니라 목 아래의 '동물'적인, '생물'로서의 정체성 역시
    인간은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감기에 걸리면 감기약을 먹고 주사를 맞으며
    물질의 도움 혹은 지배를 단 한 순간도 예외없이 받으면서도
    내 몸의 거의 대부분, 혹은 그 정신까지도 일정부분 지배하는 이 몸과 물질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무지하게 평생을 산다.
    그 사이 문학과 정치와 역사와 예술 따위만이
    '인간 고유의 어떤 것'인양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자신의 죽음에 이르러서
    대부분의 사람들,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해야 '의사의 말에 따라' 항암치료를 할지 화학요법을 할지, 아니면 민간요법에 기댈지 사이에서
    끝도 없는 무력한 고민만 하다가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게 아닌지.
    저자의 레지던트 시절에 관한 부분에는
    그가 참여했던 신경외과 수술의 장면들이
    믿기 힘들 정도로 자세히 묘사돼 있다.
    무슨 근육을 들춰내면 무슨 막이 나오고, 그걸 건드리면 사람 정신이 어떤 상태가 되는지 등등.
    언뜻 저자 자신의 죽음과는 큰 관련이 없고
    그보다는 오히려 그의 성취나 수술의 어려움만을 전달하기 위한 부분으로도 보이지만,
    나는 이런 부분들이 어딘가
    '물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은근히 보여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열어서 떼어놓고 보면 그저 몇점 살덩어리와 근육, 뼈, 힘줄 등으로 이루어진 연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몸.
    그런데 그 위에서 소위 '인간적'이라 부르는 모든 정신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담당의인 엠마의 사명감과 헌신도 인상 깊다.
    이미 자신의 몸과 병에 관한 전문가라
    담당의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대번에 여생부터 묻는 이 까다롭다면 까다로운 환자 앞에서도
    엠마는 의사로서의 흔들리지 않는 자의식과 책임감으로
    의연히 환자를 대했다.
    그러던 그녀마저도 여느 때와 달리 "당신에게는 아직 5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어요."라고
    '호소하듯이' 말하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암 진단을 받고도 레지던트로 복귀해 수술을 진행할 정도로
    불굴의 의지와 정신력을 지녔던 저자의 병세가
    기어이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악화됐을 때의 일이다.
    이런 훌륭한 의료진들과 단순한 의사-환자 관계를 넘어선 지적인 소통으로
    스스로 수긍할 수 있는 의료 서비스를 받고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마지막 숨을 고를 수 있었던
    저자 폴 칼라니티의 짧은 삶..
    아버지 때의 일이 떠오르고
    또 언젠가 나에게, 아니 모두에게 다가올 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책이었다.
    이럴 걸 어느 정도는 알았기에
    이런 주제의 책을 한동안 읽지 않았는데
    결국 끝내 피할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토록 추구했던 죽음과 삶의 의미를
    이제는 완벽히 이해했을까.
    그것을 이해했다면,
    죽음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고 싶어 의학에 매진했던
    폴 칼라니티라는 하나의 정체성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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