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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 Giver, 세상은 어디까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일까
    보고 듣고 읽은 것들/책 2016. 5. 23. 01:53

     

    the Giver(한국어판 제목 <더 기버 : 기억전달자> ) 원서를 다 읽었다. 3월 7일부터 읽기 시작해서 약 80일(주말은 대체로 쉼) 걸렸다. 투데잇 앱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하루 평균 1시간 12분, 3쪽씩 읽은 것으로 나온다. Coraline보다는 확실히 어휘 수준이 높고 글자도 빽빽해 하루 3쪽도 쉽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사실 이런 기록들보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다.
    기억 없는 기록은 쉽게 잊힌다. 나중에 내가 이 소설을 기억한다면 그건 이야기가 주는 체험을 기억하는 것이지 하루 3쪽, 1시간 12분은 굳이 외우려하지 않는 이상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3과 1, 12 따위의 숫자는 삶에서 거의 아무런 맥락도,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의미, 기억은 이 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도 맞닿아 있다.


    이야기는 근미래로 보이는 어느 시점, 빈부격차도 탐욕도 굶주림도 서로 죽고 죽여야 하는 명분도 종교나 피부색의 차이도 없이 모두가 '똑같이', '평화롭게' 사는 한 가상의 사회에서 전개된다. (단, 직업의 귀천은 희미하게 남아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소설 속에서는 이곳이 '커뮤니티'로 지칭되는데, 이 '커뮤니티' 속 사람들의 모습은 존레논의 <이매진(Imagine)>의 가사를 떠오르게 한다.


    Imagine there's no countries.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No need for greed or hunger.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그런데 언뜻 완벽한 이상향으로 보이는 이곳에도 결핍된 것이 있으니, 바로 '차이'와 그로 인한 '감정', 그 감정이 깃든 다양한 '과거의 기억'들이다. 서로 차이가 없으니 시기질투, 반목과 고통이 존재하지 않고 진정한 기쁨도 사랑도 싹틀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인생의 빛나는 한 순간', 혹은 '터널처럼 어둡고 힘들었던 시절'같은 이미지로 마음 속에 간직하는 '기억'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이 이토록 균질화된 사회를 선택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오랜 옛날 커뮤니티 사람들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 끔찍한 대혼란과 파멸(아마도 전쟁)을 겪었고 그에 대한 통렬한 반성에서 서로의 '다름'을 없애고 '달랐던 시절'의 기억까지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버리게 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그런 사회와 삶을 유지하기 위해 성욕을 비롯한 일체의 감정과 불필요한 욕구의 발현을 막아주는 약을 매일 먹어야 한다. 완벽한 조화와 균형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언행은 일상적이고 즉각적인 통제와 교정, 처벌의 대상이 된다. 이런 식의 삶, 확실히 숨막히고 공허해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또 그 '공허함'이란 것도 그것을 느낄 감성마저 없다면 그리 슬픈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소설 속 커뮤니티가 어딘가 갑갑해보이면서도 또 나쁘게만 보이지만도 않는 이유다.


    단, 기억의 진공상태인 이곳에도 집단적 기억을 보유해줄 누군가는 필요하다. 커뮤니티가 예측치 못한 사태에 봉착했을 때 과거의 기억 속에서 '지혜'를 찾아내어 조언해줄 현자, '더 기버(기억전달자)'가 있어야 하는 것. 소설은 모든 것-심지어 색(color)까지-이 균질화된 사회에서 유일하게 과거의 기억을 보유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조너스는 이 기억전달자로부터 기억과 감정을 전달받으며 마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판도라가 상자를 열어 금단의 세상에 눈뜨듯, 주위 사람들과 다른 눈과 마음을 가진 존재가 되어간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을 꼽자면 조너스가 '색'(특히 선악과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색)을 처음 느끼는 부분이었다. 시작 부분에 색에 관한 언급이 따로 없어 굳이 이야기 속 세상을 흑백으로 인식하진 않았는데, 영화가 아닌 소설이니 가능한 연출인 것 같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영화 속에서는 처음부터 세상이 흑백으로 그려져 모종의 복선 역할을 한다. 오래 전 영화 <플레전트빌>을 떠올리게 한다. 전에 한 남성이 가족으로부터 선물받은 색맹교정 안경을 쓰고 처음으로 딸의 눈동자 색깔을 알아보며 눈물흘리는 동영상을 본 적 있는데 그 때의 먹먹한 느낌도 생각나고)

     

    소설가 천명관은 '모든 소설은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던데, 바꿔 말하면 모든 소설은 '(주인공의) 수난극'이라는 얘기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조너스에게는 '수난'이 기다리고 있을 터. 그것은 세상을, 진정한 기쁨과 아름다움, 깊은 사랑이 존재하되 그만큼 극심한 고통과 추함, 미움이 따라다니는 곳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공허하고 무의미해보이며 지극한 행복도 기쁨도 없지만 극도의 불행도 차별도 없이 평화롭고 안전한 곳으로 남겨둘 것인가 하는 선택으로 필연적으로 귀결된다.


    사실 작가가 이런 이분법적 선택을 분명하게 제시한 건 아니다. 하지만 기쁨과 사랑, 행복이 넘치면서 고통과 미움, 불행만 피해갈 수 없을까? 그런 선택이 가능할까? 이 소설을 영화화한 것도 보았는데, 영화 속에서 기억전달자는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고 소리친다. 하지만 어떻게? 사랑으로? 우리가 대문을 열고 사랑을 불러들일 때 사랑이 끌고 들어올 그림자(미움)를 우리는 잘라버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힌트는 기억전달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슬쩍 제시된다.

     

    "The worst part of holding the memories is not the pain. It's the loneliness of it. Memories need to be shared."

    ("기억이 힘든 건 그것이 고통을 줄 때가 아니야. 그 기억을 홀로 짊어져야 할 때지. 기억은 함께 나누어야 하는 거란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조금 뜬금없게도 세월호 생각이 났다. 답은 어쩌면 사랑, 행복 같은 거창한 가치보다, 값싼 동정과 보상보다, 그저 '함께 마음을 나누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단순해보이는 것이 사실 진정 어렵기에 그 모든 문제가 파생되고 이어져 온 것이겠지만.


    책은 모두가 쉬 결정내리지 못하는 그 지점에서 '열린 결말'로 끝나되 최소한의 희망의 불씨는 남겨놓는다. (영화는 조금 더 닫힌 결말로 끝나지만 그것이 곧 '해피엔딩'인 것도 아니다)

     

    전체적인 세계관 설정에서 영화 <가타카>나 조지오웰의 소설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등 몇몇 다른 작품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기억전달자'라는 특이한 역할 설정이 기억에 남는 소설이다. 1993년에 아동/청소년문학에 수여되는 뉴베리상을 수상했다. 한국어 번역본은 큰 오역은 없지만 전체적으로 썩 매끄럽지는 못하다는 인상을 준다.


    #한 가지 사소한 발견.
    <이매진>의 가사에는 '사랑으로 가득한(full of love)' 따위의 구절이라든가, 아니 그 흔한 '사랑', '기쁨'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예 등장하지 않능다.
    존레논은 상상속 이상향이 당연히 사랑으로 가득한 곳이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표현은 굳이 집어넣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그 어떤 차별도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사랑도 기쁨도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했던 것일까?
    설마, 후자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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