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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년 my 올해의 책 No.1 (下)
    보고 듣고 읽은 것들/책 2019. 1. 10. 18:10


    어제에 이어 <모자란 남자들>에 관한 내멋대로 감상을 올린다.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곁가지'의 탄생의 의의에 대해서.


    그런데 자꾸만 곁가지라느니 모자라다느니....

    독자의 성별이나 성향, 가치관에 따라 듣기에 다소 거북할 수 있는 표현이다. 

    실제로 모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이 책을 찾아보니 누군가가 다분히 불편한 심기로 썼음이 절절이 느껴지는 장문의 서평이 있었다. 

    글의 요지인즉슨, 

    남성이 수학도 더 잘하고 힘도 세며, 생식기관과 배설기관이 분리되지 않은 것도 열등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진화의 증거'라고 볼 수 있는 것인데

    그런 남성을 '모자라다'고 하다니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모자란'이라는 말에 불편해진 그 심정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도 예전에 다니던 출판사에서 출간하려던 책의 제목이 『ダメな女(구제불능 여자)』여서 혀를 찼던 기억이 난다. ㅎ 

    (책은 다른 출판사에서 <쓸모없는 여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런데 사실 이 책에서 말하는 '모자람'이란 지능이나 근력 같은 현실적 능력치가 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자가복제' 가능성, 생식시의 자기 완결성, 유전적인 안정성, 혹은 유전에 대한 기여도가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닐지. 


    여기서 '그렇다면 여성, 암컷은 혼자서 생식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대답은 예이기도 하고 아니오이기도 하다. 

    수컷이라는 성을 만들어내면서 암컷도 그에 따라 상보적으로 진화해 왔을 테니 '현재의' 암컷 역시 태초와 같은 완전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생명이 등장한 초창기에 성은 아마도 단일성이었거나 암컷의-현재의 암컷에 대단히 가까운-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여성, 암컷의 몸을 보면 자손을 잉태하고 낳기 위한 거의 모든 기관을 갖추고 있다. 

    딱 하나, 다른 개체의 유전자를 받아들이기 위한 기관만이 '현재의 암컷'이 생식할 때 필요하되 결여된 기관인데, 

    이는 그 기능을 외주화하면서 사라진 것이므로 생명체에게 본질적으로 필수적인 기관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태곳적 그대로 암컷의 형태로 혼자 끊임없이 자손을 낳아 키우면 될 것을 인류를 포함한 많은 종은 

    뭐하러 성별 분업을 통한 번식이라는 번거롭기 짝이 없는 방식을 택한 걸까?


    이에 대한 설명이 후반부에서 이어진다. 예로 등장하는 것은 진딧물이다. 

    암컷으로만 이루어진 진딧물 아마조네스에서는 평상시 처녀 생식만으로 충분히 후손이 만들어지지만,

    볕이 줄고 찬바람이 불며 가을이 찾아올 무렵이면 암컷의 몸에서 X염색체가 하나 모자란 존재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다. 수컷이다. 

    수컷의 역할은 겨울이 오기 전에 최대한 많은 암컷과 교미해 수정란을 만들게 하는 것.

    암컷의 난자가 갖고 있는 X염색체와 수컷의 정자가 갖고 있는 X염색체(진딧물의 정자에는 Y염색체는 없다고 한다)가 만나

    새로운 XX형 암컷 수정란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때 수컷이 가지고 있던 X염색체 역시 당연히 암컷에게서 온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인간 여자가 남자와 결혼을 하는데, 언뜻 남성과 결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전자 차원에서 보면 여자는 남자의 어머니, 즉 시어머니와 결혼하는 것이랄까.

    그렇다면 그 사이에서 남자는 어머니 유전자를 날라다 주는 매개체, 배달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 된다.

    이 '시어머니와의 결혼' 비유는 책에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저자도 본문에서 使い走り(심부름꾼), 飛脚(전령, 배달부)라는 표현은 꽤 여러 번 쓰고 있다. 


    요네하라는 앞서 언급한 책에서 수컷의 존재 이유를 '진화의 전위 부대, 선발대 임무를 맡기 위해'로 적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후쿠오카의 주장은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결국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후 등 자연 환경의 변화로 생명 활동이 위협받을 때, 집단 안에 같은 유전자만 존재할 경우 그 집단은 절멸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에 대비해 여러 암컷의 유전자를 서로 섞어 다양성을 갖출 필요가 있으며,

    그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수컷이라는 것이다. 


    전부터 인간 남성이나 자연계의 수컷을 보면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그 생물종의 '성장'이다. 

    진화, 전진, 발전, 성취,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나는 학자가 아니니까. 

    반면 암컷은 '존재'다.

    존재의 기반이자 존재 그 자체.

    '존재' 후에, 거기서 뭔가 플러스알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수컷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한 가지에 잘 집중하는 많은 남자들의 특성은 그런 특정 목적을 위해 부여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수컷 만들기 프로세스'가 그렇게 완벽하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수컷, 혹은 인간 남성은 한 가지 방면에 특출난 경우도 많지만 동시에 취약한 것도 많다. 

    개인을 놓고 봐도, 집단을 놓고 봐도 남성은 여성에 비해 특징이나 능력의 기복이 크고 중간영역이 두텁지 않다.

    대개의 분야에서는 정규분포 곡선을 그려보면 남성이 여성보다 중간층이 얕고 양극단이 발달한 형태가 될 것 같다,

    개체 내, 혹은 집단 내의 안정성이 떨어진다고 할까, 불균질화 돼 있다고 할까.

    (물론 '안정성이 높다', '균질하다'는 것은 단어가 주는 긍정적인 뉘앙스와 달리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그건 그것대로 '정체'를 초래할 테니)


    여기서 저자의 설명도 '남성의 취약함'으로 넘어간다. 

    남성은 태아 때부터 모체의 뱃속 환경에 더 쉽게 영향 받고 

    태어나서는 흡연 음주 등의 환경요인을 고려하고도 암 발병률이 훨씬 높으며

    그 귀결인지 모르겠으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평균수명이 여성보다 훨씬 짧은데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남성의 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면역계의 작용을 억제해 암 발병률을 높인다고 한다.

    이 하나의 근거만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는 무리겠지만 대단히 시사적이라는 생각은 든다. 


    이토록 취약한 남성.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고, 오늘날도 그렇다.  

    바로 자손을 퍼뜨리는 것(이라고 적고 사실은 모계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이라고 읽어야 한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이다. 

    현재 아시아 남성 인구의 8%에 해당하는 1600만 명의 남자들이 공유하는 단 하나의 Y염색체.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 이 염색체를 퍼뜨린 것으로 추정되는 한 명의 역사적 인물을 추적해가는 과정도 흥미진진하거니와,

    이 Y염색체가 달성한 위업과 그 의의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우리의 호주제 폐지론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었던 사실이 떠올라 사뭇 시사적이기도 하다. 

    (당시 서울대 최재천 교수는 '유전학적 호주는 여성'이라고 주장했다. 

    후쿠오카도 이 책에서 일본의 황위 계승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아마도 기본적으로 같은 입장일 것이다)



    이렇게 '암컷의 유전자를 배달해서 섞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인 수컷, 남성이 

    언뜻 세상을, 혹은 여성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다소 도발적인 자문에 대한 저자의 자답은 더 도발적이다. 

    '여성, 암컷이 너무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컷이 만들어진 본래의 목적을 넘어,

    암컷의 명령에 따라 여러 가지 가외의 노력 봉사까지 하게 하면서 거기서 만들어진 잉여 생산물, 권력 따위를

    점차 독차지하기 시작하면서 남성의 지배구조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다. 

    음...그런가?

    사회생물학이나 인류학, 진화론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존재'(현실)와 '당위'가 아슬아슬하게 교차할 때가 있다.

    '현실이 이러저러하다'는 얘기는 자칫 잘못하면 

    '이러저러하지만 그건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다', 혹은 '앞으로도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져

    현상황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학설 자체의 내용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어떤 사람'은 항상 그런 '틈새'를 만들어낸다. 

    이 주장도 그렇게 들릴 가능성은 있다. 

    역사적으로 여성에게 헌신적인 남성보다는 

    남성이 지배하는 가부장적 질서 하에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착취 당한 여성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 때문인지 나도 이런 바이어스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주장을 접할 때는 종종 '지금 현재의' 나나 내가 속한 집단에서 시야를 한참 떨어뜨려 볼 필요가 있다. 

    도킨스가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이기적인 본성'을 지닌 단위를 개체가 아닌 유전자 레벨로 바꿔 설명했듯. 

    그렇게 보면 남성이라는 성은 그 본래 목적을 달성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성취와 기여를 많이 한 것도 사실이니

    후쿠오카의 이 썰이 일리가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단, 그렇다고 해도 그가 여기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든 사례는 너무 특수한 경우라 딱히 수긍이 가진 않았다.

    다루기는 참 자세하게 다루었던데, 어느 정도 대표성이 있다고 봐야 할지? 

    (부인 주도로 저질러진 한 부부 과학자의 대국민 사기극이 소개돼 있는데 그냥 신문 가십 기사 같은 느낌...)

    그런 의미에서 제10장 '하버드의 별' 편은 빼고 다른 사례를 넣는 게 더 나았을 지도 모른다. 이 책의 옥의 티라고나 할까. 


    여기까지 여러 가지 데이터와 연구 결과, 과학사를 소개하며 

    (남)성의 탄생과 그 의의를 피력해 온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다소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다.

    '가속각'이라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개념의 등장이다. 

    이를 '준과학'이라고-이런 말이 존재하는지는 차치하고-지적하는 서평도 보았지만

    내 생각에는 준과학이든 유사과학이든 굳이 분류할 필요 없이

    이 부분은 그냥 비과학이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그런데 앞의 어느 장보다 집중해서 읽게 만든다. 

    가속각. 

    유원지에서 롤러코스터나 바이킹을 타고 내려갈 때, 혹은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하강하기 시작할 때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찌릿'하고 오금이 저리는 그 느낌.

    나는 특히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바깥이 보이는 엘리베이터에서 아랫도리가 더 후덜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한편 상체에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다. 

    그러면서 '엘리베이터가 내려갈 때면 왜 아랫도리에 오금이 저릴까'하고 궁금했지만 딱히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후쿠오카가 그 감각을 이렇게 절묘하게 남성의 존재 의의와 결부시킬 줄이야. 

    이를 설명하려면 몇 가지 관련어를 나열해야 한다. 

    일상. 일탈. 속도. 가속도. 감각. 살아있다는 느낌.

    일정한 속도로만 진행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살아있음', '존재의 이유'를 느끼게 해주는 흔치 않은 순간, 

    이것을 사정할 때 남자들이 느끼는 극치감과 연결시킨 건 그 나름의 통찰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남성이 아닌 나도 엘리베이터에서 오금 저리는 느낌을 받으니 

    단순한 직관을 너무 확대해석한 거라 해야 하나?

    하여, 과학적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나름 신선한 발상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성의 분화, (남)성의 존재 이유에 대해

    단순히 사실이나 데이터 나열에 그치지 않고 저자 나름의 주장이나 의견도 조심스레 비쳐가며

    이토록 생생하게 설명하는 책을 나는 달리 더 보지 못했다. 

    2018년 my 올해의 책 1위로 주저없이 이 책을 꼽은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정도면 내 이야기는 얼추 다 나왔다. 

    남은 건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뿐.

    평소 '직관'으로, 무의식적으로만 알고 있던 점을 의식이라는 수면 위로 끄집어올려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는지는 오롯이 읽는 이의 역량에 달려 있다. 

    내가 산 원서에는 핑크색 띠지가 둘러져 있고 그 위에 '여성 필독'이라고 적혀 있는데,

    필수로 읽어야 할 독자를 굳이 왜 여성에만 국한시키는 걸까? 

    심지어 책 내용이 '남성 탄생의 기원'인데도 말이다...

    이런 부분도 포함해서

    더 많은 남성 여성이 읽고 더 많은 반론을 제기하며 이야기의 장을 풍성하게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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