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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삼촌 브루스리 - 실패한 브루스리들에 관한 이야기
    보고 듣고 읽은 것들/책 2016. 5. 10. 02:24

     

     

     

     

    거두절미하고 재미있다.

     

    한 지인이 같은 작가(천명관)의 <고래>를 강추하며 일독을 권할 때만 해도 '그런가보다' 했다. 소설이 개인적으로 그다지 '땡기는' 장르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러다가 모 인터넷서점 전자책 앱에서 작가의 다른 작품 <나의 삼촌 브루스리> 1, 2권을 4, 5월 두달 동안 한달에 1권씩 무료 대여해준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반으로 다운로드한 것이 계기가 됐다.

    대구 출장 다녀오던 어느 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KTX 안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킥킥 거리며 읽다가 순간순간 불시에 깔리는 차내의 정적에 혼자 겸연쩍어하기를 몇 차례.

    한동안 소설을 가까이 하지 않아 '이야기'를 읽어내는 내 감성이나 감도가 그다지 높은 수준은 아닐 텐데, 그런 내가 느끼기에도 이 작가, '보통 입담은 아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화자인 '나'의 삼촌.

    이소룡의 무술영화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6, 7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전국적인 투기개발붐이 일기 전의 '동천'이라는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브루스리'는 이소룡의 열혈팬이었던 삼촌을 가리키는 말.

    무술 실력에서만큼은 이소룡을 따라갈 수 없었겠지만

    기구한 인생유전에서만큼은 뒤지지 않았던 풍운아 삼촌의 일대기가 이야기의 뼈대가 된다.

    사실 삼촌뿐 아니라 이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에 풍운아가 아닌 사람도 드물다.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사는 화자인 '나'나 그 형 정도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인생이 고달프고 버거운, 사람이 사무치게 그리운 장삼이사들..

    삼촌의 아이를 낳지만 이내 버림받고 조폭 마누라가 되는 독극물의 여왕 오순이나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다리 하나 팔 하나, 혹은 하나 있는 목숨까지 잃는 게 예사였던 당시 동네 양아치들(도치, 토끼),

    겹치는 불운을 이겨내지 못해 순박한 시골소년에서 폭력배로 변해가는 '나'의 친구 종태,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속으로는 주위 사람을 믿고 살뜰히 챙겨주지만 끝내 사무치는 외로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화교 출신 중국집 여주인 마 사장,

    마 사장과는 반대로 단테의 베아트리체가 울고 갈 정도로 삼촌이 평생토록 순애보를 바치지만 권력과 욕망의 어두운 그늘에서 좀처럼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는 여주인공 원정.

    이들이 빚어내는 '애증과 배신과 좌절과 몰락'의 불협화음 속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뒤틀리고 부서지고 상처 투성이가 되어 나락으로 굴러떨어져버린다.

    너무나 쉽게. 너무나 사소한 계기로.

    하긴 우리 인생이 배배 꼬이는 데 그렇게 대단한 계기가 필요하진 않더라...

    나중에서야 그것이 비극의 시발점, 희비의 변곡점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당시에는 그저 변변찮은 일상 중의 하나였을 사소한 질투, 대단치 않은 미움, 흔한 의심들...

    해서, 이 이야기는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한 실패와 비극. 그것으로 점철된 인생을 미련스럽게 살아가는 중생들의 이야기'다.

    그런데...이야기는 비극 투성이지만 작가의 입담 때문인지 어딘가 한 군데씩 결핍된, 나사가 빠진 캐릭터 때문인지 읽을 때의 기분은 비극적이기보다는 희극적인 편이다.

     

     

    실감 나는 상황 묘사, 사건 묘사도 매력 중 하나.

    영화판의 생리, 시골 역전 한가닥들 하는 주먹들의 세상,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에 관한 묘사 등등,

    소설 습작 이전에 작가의 인생 경험 자체가 풍부하지 않으면 얼추 그럴싸하게라도 다루기 힘든 소재들이다.

    다만 곁가지 사건들이 너무 많고(디테일이 충실하다면 충실한 거겠지만)

    마초 냄새 풀풀 나는 건달들의 결투 장면이나

    외로움에 '쩔은' 여자들의 인생에 대한 신파조 묘사가 조금 식상하기는 한다.

    물론 이런 것도 어디까지나 개취일 뿐, 60~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90년대 오렌지족처럼 매끈쌔끈 쿨한 캐릭터가 비현실적일 수는 있다.

     

     

    읽는 내내 <말죽거리 잔혹사>, <강남 1970> 같은 영화의 장면들이 어른거려

    '혹시 영화화한다면 누굴 캐스팅하고 어떤 스토리로 각색될까?'를 생각하기도 했다.

    일단,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이 너무 많아 두 시간 안팎으로 영화화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게다가 남자주인공은 잘생기지도, 그렇다고 막 못생기지도 않아야 하고 키가 크지도 않아야 하며 말도 더듬어야 하고 어딘가 자신 없어 보이고 지지리궁상스러우면서도 단호한 구석도 있어야 하고 무술은 또 수준급으로 해야 한다(액션 연기 자체는 대역이 한다 해도 그 간지는 좀 나야할듯). 헉헉...

    한마디로 상업영화에서 소화하기 어려운 남주 캐릭터라는 얘긴데...

    영화 쪽 지인 말로는 이 소설을 영화로 실제 각색 중인 사람이 있다고 하니

    조만간 스크린에서 만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묘사될지?

    작가의 말대로 소설이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 '실패', 혹은 '실패로 점철된 인생'에 관한 느낌,

    무언가 늘 결핍돼 있고 주변머리 없이 어눌한 모습,

    성공과는 먼 곳에서 인생의 외진 곳, 한데만을 맴돌며 그저 꾸역꾸역,

    하지만 구차한듯 강인하게, 그렇게 끝끝내 삶을 살아내고야 마는 이들의 모습을 어떻게 담아내느냐가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관건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강남 1970> 속 거적대기 뒤집어쓴 꽃거지 형제(이민호, 김래원)처럼 나오면 정말이지 안 보러 갈 거임...ㅎㅎ

     

     

     

    # 공짜로 두권짜리 소설을 보니 도무지 미안한 마음에 <고래>는 살 수밖에 없었다. 지인의 추천사를 듣자하니 이 쪽도 만만치 않은 이야기인 것 같다. 두근두근!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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