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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피엔스 - 자네는 참 무식하구먼
    보고 듣고 읽은 것들/책 2016. 5. 6. 20:19

     

     

     

    빅퀘스천, 빅픽처, 빅히스토리...

    요즘 서점가에 '빅(Big)'의 물결이 넘실댄다.

    역사, 경제, 과학,... 분야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요즘 유난히 큰 질문을 하고 그 대답을 책에서 찾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왜 큰 것을 찾을까?

    그만큼 세상이 불확실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경제가 성장하고 인구가 유지 or 안정적으로 늘어나며 과학기술이 예측 가능한 수준에서 발전할 때에는 그러한 상태가 디폴트(기본상태)고 의심할 필요 없는 선(善)이며 변화의 폭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기 때문에 기존의 방향성을 부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내실만 기하면 개인이든 기업이든 대충 '평타는 친다'.

    북쪽으로 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정북방향으로 갈지 북북서로 갈지 미세한 조정만 제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이때 괜한 큰 의문은 자칫 허황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경제가 만성적 저성장의 늪에 빠지거나 후퇴할 때, 아이들은 안 태어나고 중장년, 노년층만 거리에 점점 늘어날 때,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것 같기는 한데 너무 극적으로 발전해서 이것이 우리에게 약이 될지 병이 될지 헷갈릴 때, 우리는 항로가 북인 줄 알았는데 남이나 서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애초에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북쪽을 향하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인지 원점에서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많은 화제를 뿌린 빅히스토리 도서 <사피엔스>은 이 Big 물결을 선도하는 책 중 하나다.

    저자 인터뷰에 관한 리뷰 포스팅은 어제 했고,

    책 자체에 관해서 한 꼭지만 글을 남기기로 한다.

    워낙 방대한 내용의 책이라 솔직히 책 전체를 관통하는 '평'을 내릴 엄두는 나지 않는다. 그럴 깜냥도 없고...

    다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단연 제4부 과학혁명의 '무지의 발견'을 들 것이다.

    지구의 듣보잡 캐릭터였던 인류가 인지혁명을 이룩하고 진출하는 곳마다 족족 다른 종들을 멸종시키며 다크호스로 부상하는 흑역사와(제1부)

    농업혁명이 인류 전체와 개개인 차원에서 상이하게 미친 영향(제2부)

    인류가 통합해가는 과정 속에서 어떤 가상의 네트워크(돈, 종교, 제국)가 효과적으로 기능했는지에 관한 기술도 분명 흥미로운 부분이었다.(제3부)

    특히 주객을 전도시켜 '밀의 입장'에서 농업혁명을 바라보는 부분은

    리처드 도킨슨이 제시한 '이기적 유전자가 개체(인간 포함)를 숙주로 삼아 자신의 번영을 도모한다'는 시각만큼이나 신선했다.

    혹은 제국의 순기능(?)에 관한 저자의 시각도 논쟁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이 간다.

    인공지능이 '의식'을 갖는 날이 올지,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과연 성공할지도 초미의 관심사 중 하나다.

    그런데 이런 이슈들보다도 지금 더 근본적인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부분은

    서양의 중세와 근대를 나누는 요소의 하나로 '무지의 발견'을 거론한 부분이었다.

    한 명의 사피엔스이지만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스스로 겪어보지 못한 동양 사회의 구성원인 내게는 이 '무지의 발견' 과정이 꽤나 인상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느껴진다.

    (동양사회에 내재적 변화 가능성과 역동성이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그것을 스스로 실현시키지는 못했다고 본다)

    저자에 따르면 고대/중세의 지식전통에서 '무지'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만 인정되었다.

     

    1. '개인'이 '중요한 무언가'를 모르는 경우

      ->해결책 : 중요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현자'에게 물어보면 됨. 단, 많은 경우 반론은 허용되지 않음.

      ->가령 13세기 요크셔 지방의 농부가 인류의 기원에 대해 알고 싶다면 동네 사제에게 물어보면 답을 말해줌. 16세기 이탈리아의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처럼 '신, 인간, 우주는 모두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고 그 치즈에서 구더기가 나오듯 혼돈 속에 창조되었다'는 둥 허튼 소리를 지껄였다가는 이단으로 몰려 당장 치도곤을 맞거나 화형에 처해짐.

     

    2. '집단'이 '별로 안 중요한 무언가'를 모르는 경우

       ->해결책 : 애초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므로 궁금해하지 않으면 됨

       ->가령 위의 요크셔 지방 농부가 '거미가 거미줄을 어떻게 치는지' 알고 싶다 해도 이런 질문은 그 자체가 무의미함. 성경에 적혀 있지 않은 것은 신이 보시기에 별로 중요하지 않아 가르침을 주시지 않은 것이므로 궁금해할 필요가 없음. 유전법칙을 발견해 낸 멘델이 실험 결과를 과학 저널에 발표한 것은 19세기였지만 그 중요성과 가치가 인정된 것은 20세기 들어서의 일. 그 전까지 지구상 대부분의 인간사회와 지식전통에서는 유전의 의미와 중요성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알 필요가 없는 지식이었음

     

    이는 비단 종교적 도그마에 갇혀있던 서양의 고대/중세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라면 '공자왈(曰), 맹자왈'로 시작하는 고전 속 구절이 익숙할 것이다. '공자질(質), 맹자문(問)' 따위는 뒤져보면 나올 수도 안 나올 수도 있겠지만 어찌됐든 우리 귀에 익숙한 구절은 아니다. 공맹은 위대한 가르침을 남기고제자와 후손들은 그 가르침을 받든다는 것이 기본 도식이다. 그 말씀에 대한 해석, 즉 주석서 조차도 한반도에서는 오랜 세월동안 하나의 해석만이 정통으로 인정되었다. '감히' 증명을 통해 반론, 논박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전통이 아니며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4단7정 이기논쟁은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규칙을 증명하는 예외'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즉, 알아야 할 모든 것은 다 고대 현인들이 남긴 가르침 속에 있으므로 후대에 태어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고의 행동은 '군소리 없이 선대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되기 십상이다.

     

    이에 반해 16세기 이후 두드러지기 시작한 서양사회의 변화의 본질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우리는 세상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었을까? 신(God)이라는 무결점, 무오류의 존재에 중세 천년의 세월을 바쳐 복종했지만 여전히 오류와 결점은 도처에 존재하고 신은 그 해결에 도통 무관심해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무엇이 난파로 인한 익사와 영양실조로 인한 아사의 위험에도 고집스럽게 '바다 저 너머'를 향해 닻을 올리게 만들었을까? 호기심이나 모험심이 일종의 부족, 결핍 상태에서 오는 것이라면 혹시 쌀에 비해 단위 면적당 인구부양력이 낮은 밀을 주식으로 했던 것, 즉 아시아나 아메리카대륙에 비해 상대적으로 척박했던 유럽의 자연환경도 모종의 관련이 있을까? 혹은 다른 요소, 가령 인종적 차이 같은 것도-이런 것이 존재한다면-유의미하게 작용했을까? (해묵은 우생학 얘기를 꺼낼 생각은 물론 없다) 이에 대한 분명한 설명은 딱히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흥미로운 것은 '지도'였다. 저자가 제시한 바에 따르면, 서양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며 발현되는 그 왕성한-그리고 기어이 탐욕스러워지는-호기심과 정복욕은 당시 제작된 지도에서 대단히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가본 적 없는 지역에 대해서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이것저것 빼곡히 기록해놓은 중세의 지도와, 분명 왕성한 탐험(혹은 침략) 활동을 통해 이전 시대보다 아는 지역이 넓어졌을 텐데도 오히려 여백만 뻥뻥 뚫려 있는 근대의 지도.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아예 지도 자체를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도 있었을 것이다. 이는 각각의 사회가 세상을 보는 시각, 무지를 대하는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이런 지적 전통이나 그것을 형성, 유지해온 사회에 우열 등급을 매길 생각은 없다. 그것이 얼마나 촌스럽고 단편적인 결론으로 수렴되기 쉬운지를 알고, 그들의 그 탐욕스러운 호기심이 지금까지 거의 언제나 타자의 끔찍한 희생을 통해서만 해소되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가치 판단 이전에, 아시아, 특히 내가 사는 이 사회가 여전히 '호기심에 관대한 사회', '질문을 환영하는 사회'는 아님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겉으로는 호기심을 장려한다고 하지만 호기심을 표현하는 것은 곧 무지, 무식, 부끄러운 일로 간주되기 일쑤며 남의 말, 특히 '윗사람 말에 토다는 것'은 사회 생활하는 데 여전히 금기 중의 금기다. 개인적 경험을 나열하자면 앉은 자리에서 한 백 가지쯤 들 수 있지만 시간 관계상 생략하고...아무튼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호기심을 장려하지 않는 사회임을 대놓고 선언하거나, 말대꾸하는 애송이에 관대한 사회가 되기 위해 노력하거나 둘 중 하나 밖에 없다. 권위주의적인 분위기나 무지에 대한 터부시는 호기심과 양립하기 힘들다.

     

    '무지의 발견'은 이렇듯 '호기심, 질문' 과 관련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앞으로의 교육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교육은 한자로 가르치고(敎) 기른다(育)는 뜻이다. 행위 자체도 적극적이며 그 행위의 주체는 보통 부모님이나 선배, 선생님 등 '나보다 많이 아는 어른'이 된다. 한편 영어 educate는 라틴어 '밖으로' 라는 뜻의 e와 '끌어낸다'는 뜻의 ducare가 합쳐진 말로 어른의 역할은 인도자 수준에 머물며 교육 대상의 잠재력을 얼마나 끌어내는지가 educate 성패의 관건이 된다. 상대방의 잠재력과 호기심을 이끌어내려면 내가 아는 척 하거나 지식을 강요하면 안 된다. 상대방의 '무지에 대한 두려움'과 '그냥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치자'는 착각에 대한 동의만을 낳기 때문이다. 이 인지부조화에 대한 묵살은 안타깝게도 우리 교육 현장에서 무척 익숙한 풍경이다.

     

    저자는 지난 달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있었던 강연회에서 '앞으로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에 관한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은 취지의 답변을 하면서 그날의 발언을 마쳤다.

     

    "앞으로 어떤 시대가 펼쳐질지,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이 요구될지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따라서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시험이나 평가 등, '무지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는' 교육은 지양해야 할 것. 무지를 인정하고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다가올 인공지능+초장수시대, 교육은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평생 교육도 어르신이나 정년퇴직자가 인생2라운드를 단순히 조금 더 여유있게 즐기기 위해 문화 센터 같은 곳에서 한가로이 듣는 교양 강좌가 아니게 되었다. 질문자가 의미했던 '교육'의 대상과 달리 저자가 말한 '교육'의 대상은 수십억의 잉여 예비군인 우리 자신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 운운하기 전에 나는 얼마나 그 준비가 돼 있을까? 궁금증이 별로 없어야 속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에 나름 익숙해져 있다보니 이제는 나도 이런 Big Question이 영 부담스럽다. 커도 너무 큰 질문인데...어디 좀 더 힌트가 될 만한 게 없을지? 괜시리 책을 뒤적거리다 표지 뒷면을 보니 'From one Sapiens to another'라는 저자의 친필 메시지가 인쇄되어 있다. 무지의 발견까지는 내가 해주었지만 그 답을 찾아가는 남은 여정은 명색이 '사피엔스'인 YOU의 몫이라는 뜻일까. 600p가 넘는 두께에도 저자의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 덕에 술술 잘 읽히는 편이긴 한데, 정작 다 읽고나니 그때부터 본격적인 질문을 하는 책이다.

     

     

     

    #이 글의 부제(자네는 참 무식하구먼)는 대학 시절 은사님께서 온화한 미소를 만면에 띄우고 종종 해주셨던 애정어린(?) 말씀. 나중엔 하도 들어서 별 느낌도 없어지던 ㅋ 그 말씀이 이제 와서 이토록 와 닿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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