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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즈와 구더기
    보고 듣고 읽은 것들/책 2006. 12. 14. 16:34

    ...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 있다.

    학부시절 은사님을 통해 '미시사'라는 분야를 접하게 되었고

    그 분야의 고전이 되어버린 이 책을 소개받아

    늘 그랬듯 '언젠가 읽어야지'하며 냉큼 사버렸다.

    그러나 역시 늘 그랬듯

    책장 한 구석을 새초롬히 장식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건

    가끔 내방에 들어와 뭐 읽을거리 없나 하며 책장 앞에서 서성거리는 언니의 물음.

    "무슨 책이 제목이 이러냐?"

    브뢰겔의 '결혼피로연'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16세기 이탈리아

    사제들의 권위와 천지창조설을 부정하고. 신과 인간, 우주는 마치 치즈 속에서 생겨나는 구더기처럼

    카오스 속에 창조되었다...는 천인공노할 주장을 펼쳐

    종교재판에 회부된 한촌구석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라는

    도서리뷰 외에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시험도 끝났고, 눈도 어느 정도 회복된 듯 싶어

    비로소 책을 펼치기로 했다.

    소설과 역사의 경계를 허무는 서술이 항간의 유행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원류격인줄 알았던 이 책은 생각보다 딱딱하다.

    많은 각주 때문인지...난삽한번역때문인지...모르겠다.

    그래도 시종 신경쓰이는 건

    주인공 메노키오는..그의 사상은 어디에서 왔는가...하는 점.

    세상에는 돌연변이를 가리키는 많은 말들이 있다.

    변태. 천재, 바보, 괴짜, 미친년놈...

    모두 당대의 "평균"에서 어느 정도 멀리 나가 있다고 "보이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 아니던가.

    유전적, 기질적 영향으로 인한 경우를 제쳐놓는다면

    이런 사람들이 이런 특징을 형성하게 된 데에는

    아니 그 특징이 '특징'으로 자리매김된 데에는

    사회의 영향이 작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선지 책을 읽다보니 푸코의 '광기의 역사'가 자꾸 떠오른다.

    메노키오의 주장은단발적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 자신은 귀족이나 대단한 지식인은 아니었으되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마을의 행정업무를 보기도 했던

    평범한 촌부치고는 식자층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경제적으로도 부자는 못 될지언정 결코 가난하지도 않았다.

    병리학적으로 보아정신병자도, 사회적으로 완전히 소외된 계층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메노키오의 사상도

    단순히 16세기 이탈리아 촌구석의 방앗간 주인이 정신이 헤까닥해서 내뱉은

    말도 안 되는 잡소리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기독교 교리가 지배하던 당시 유럽 사회에서

    천지장초를 부정했다는 것.

    매 재판에서스스로를 열띠게 변론하며

    자신의 주장을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는 것.

    굉장한 괴짜같지만

    저자 진즈부르그는 단순히 그의 괴팍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메노키오라는 한 사람의 인물을 확대경 삼아

    그가 그런 사상을 갖게 되었던 배경,

    그 밑에 깔린폭넓은 기층문화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 같다.

    정신적 병리현상이 크건 작건 사회적인 요소에좌우되는 것이라면

    메노키오의 '독특한' 사상 역시

    돌연한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닌 이상

    순수하게 독자적이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사상의 형성에는

    그의 독서 이력 못지 않게

    특이한 독서법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같은 내용의 책을 읽으면서도 어디에 '선택과 집중'의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이므로.

    그러니까 메노키오는

    억압받던 기층문화, 농촌의 구전문화,

    보편화한 기록문화 속에 함몰되어 버린 듯햇던 원초적 사상들이

    사실은 주류문화와 공존하며 물리적 화학적 변환을 겪었고

    또 그러면서도 면면히 이어져내려왔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그런 세계와의 접점,

    동굴의 입구와도 같다. 내게는 그렇게 이해됐다.

    사실첫줄에도 썼다시피

    아직 이 책을 아직 다 읽지는 못했다.

    그러니 구구절절 아는 척을 하는 것도 우습다.

    다만어떤 계기로 인해

    다 읽지도 못한 책을 놓고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생겨서....

    헌데...메노키오를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놓을 생각은 없지만

    .내가 메노키오와 같은 상황에 빠진다면

    내 뒤를 받치고 있는 사상적 자신감, 신념이 제아무리 확고부동하다 한들

    그와 같이 행동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메노키오는 결국 화형당했다.

    나는.....

    그저치즈는 치즈. 구더기는 구더기라 할지도 모르겠군...성철스님도 아니고...

    하, 자신의 이 어쩔 수 없는 이 소시민근성과 모난 데 없는 정형성에 박수를.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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