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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벚꽃으로 엔딩하기 전에걷고 쓰고 그린 것들/터벅터벅 2016. 4. 2. 21:13
안양천변 산책 중, 개나리 말고는 아직 조용하기만 한 꽃나무들 속에 홀로 만개한 나무가 있어 발치까지 가보았다. 하도 화사하게 피었길래 대뜸 사진부터 찍고 있는데 집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께서 "모델료 주는겨?"하며 빙긋 웃으신다. 모델 이름은 살구꽃이란다. 며칠 전에는 다른 동네 갔다가 만발한 매화를 보고 반가웠다. 이제 조금 있으면 벚꽃으로 온 동네가 잠시 뒤덮이겠지. 물론 그건 그것대로 아름답지만, 요즘 어딜 가나 봄이면 다 벚꽃 물결이라 그런지 먼저 핀 다른 꽃들이 한결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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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 뭐 해먹고 산담보고 듣고 읽은 것들/책 2016. 3. 16. 00:11
구본권 지음, 어크로스 펴냄, 2015 광고회사 사내 통역으로 일하던 시절, 어느 날 다른 부서 국장님이 짓궂은 표정으로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내 눈앞에 핸드폰을 들이밀며 운을 띄웠다. "00씨(나), '안녕하세요' 해봐." "..엥? 뭐지? 또~" "아, 해보라니까." "(미간을 찌푸리며)안..녕하세요....?" "(핸드폰에서)...오하요-고자이마스!(아침 인사를 뜻하는 일본어)" "아...이게...그 통번역 앱인가 봐요?" "(싱글거리며)빙고! 00씨, 이제 어떡하냐? 얘가 앞으로 00씨 일도 다 하게 생겼어!" "(끄덕끄덕)아하, 그렇겠네요. 그럼 잘 됐다. 십 분 뒤 사장님(일본인) 미팅 통역은 그 폰에 부탁 좀 해도 돼요? 전 본사에 급히 연락할 게 있어서." "(눈 찡긋, 어깨 툭)아~, 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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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vs알파고, 그리고 한 통의 편지골판지 2016. 3. 10. 01:23
'벨레로폰의 편지'라는 것이 있다. A가 B의 부탁으로 C에게 편지를 전해주러 가는데 사실 그 편지 안에는 A를 곤경에 빠뜨리는 내용이 적혀있는 경우를 말한다. 벨레로폰은 그리스로마신화 속 인물로, 자신에게 해가 되는 내용이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누군가의 지시로 한 통의 편지를 들고 여정에 나선다. 어제 하루, 이 편지 이야기가 오랜만에 생각났다. 뜬금없이 그리스로마신화로 시작하긴 했지만, 사실 어제 오후 1시 이후 TV나 포털 메인화면을 온통 장식한 것은 바둑, 바둑, 바둑 얘기였다. 심지어 JTBC 메인뉴스에도 아마 몇 단 보유자라는 기자가 나와 한편의 대국을 복기할 정도였으니 인간 vs AI의 바둑판 위 대결이 흥행에는 확실히 성공한 것 같다. 바둑의 '바'자도 모르는 나조차 이 대국의 결과가 지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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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가 궁금해?골판지 2016. 2. 28. 16:13
존비법이 엄격한 사회는 일상적으로 엄청난 감정노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이다 나이를 따지는 문화는 권위주의나 유교적 가치관, 봉건적 인간관계 등과 한데 묶여서 비판받곤 한다. ‘나이주의’라는 신조어마저 생겼다. 그런데 ‘나이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종종 놓치는 사실이지만, 나이를 따져서 높임말 사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전통의 잔재라기보다는 오히려 근대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습관이다. 조선시대 양반은 아무리 나이가 어리더라도 상민에게 말을 놓았다. (133쪽) 한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존중을 표현하게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그러한 표현을 생략하도록 허용하는 존비법의 체계는 인간관계가 원활하게 굴러가는 데 필요한 감정노동을 ‘아랫사람’의 몫으로 떠넘기는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이 문화는 아랫사람의 감정을 배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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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aline>보고 듣고 읽은 것들/책 2016. 2. 22. 00:52
, 드디어 완독했다. 1월 12일부터 시작해서 2월 21일인 오늘(사실 자정 지났으니 바로 어제)까지, 중간에 나흘 정도 빼먹은 것 말고는 매일 짬을 내 3-5p씩 낭독하기 약 40일만이다. 작년에 읽은 와 재작년에 읽은 이 먼저지만 이 두 책은 동영상 강의를 봐가며 읽은 거라 내 힘이라기 보다는 선생님들이 읽어주신 것에 가깝다. 누가 체크해주거나 같이 읽는 사람도 없는 원서 나홀로 읽기라 내용 파악이 아직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어 한국어 번역본을 주문했다. 은 새로 이사온 집에서 초등학생 Coraline(Caroline이 아님)이 겪는 일장춘몽(?) 모험이 그려진 동화. 가족에 대한 사랑, 용기 같은 뻔한 덕목을 너무 뻔하지는 않게 강조하면서 약간 호러스러운 모험의 세계로 독자를 초대한다. 주인공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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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골판지 2016. 1. 27. 19:28
거울이 나를 보고 말한다. "너는 좀 더 생각을 하라"고. "네 머리는 장식품이 아니니까"라고. "장식품이라면 좀 이뻐야 되는 것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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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선물>, 정운영보고 듣고 읽은 것들/책 2016. 1. 1. 21:47
종강이 가까운 한국경제론 강의 시간에 저는 학생들 앞에서 이런 연극을 했습니다. "올해부터 학사 관리가 아주 엄격해져서 수강생 절반을 '의무적으로' 실격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운을 떼자 교실이 일순에 툰드라의 혹한으로 뒤덮였습니다. 그렇다고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한테 무조건 F학점을 줄 수도 없으니 "학점에 여유가 있어서 이 강의 하나쯤 실패해도 별 문제가 없거나, 가정 형편이 괜찮아서 한 학기쯤 더 등록해도 큰 지장이 없는 학생들이 자청해서 나서면 아주 고맙겠다" 고 시치미를 떼었습니다. 그러고는 반장을 교탁으로 불러 '낙제 자원' 신청을 받도록 했습니다. 그 판에 누가 무슨 수로 입을 열겠습니까? 이렇게 자청하는 사람이 없다면 대표가 아무나 지명하라고 짐짓 '순교자 사냥'을 강요했습니다. 그는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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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천의 수수께끼 구조물걷고 쓰고 그린 것들/터벅터벅 2015. 11. 8. 21:12
부슬거리는 빗속에 오랜만에 안양천변을 산책했다. 천 건너편 산기슭의 단풍이 예쁘게 들어 육중한 고가도로의 무채색 다리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오늘은 늘 보던 고가도로 다리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회색 구조물이 많이 보였다. 벽돌로 지은 저 야트막한 담장, 전에 산책할 때만 해도 안 보였던 것 같은데 그 사이 만든 것인지? 식구들 말에 따르면 저기서 얼마전에 군사훈련을 하더란다. 뒤에 군인들이 줄지어 서 있다가 차례가 되면 저 위에 엎드려 안양천변 산책길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사격훈련을 했다고;;; 물론 실탄은 들어있지 않았겠지만 하필이면 동네 주민들이 아침 저녁으로 가볍게 운동하러 나오는 천변에서 민간인 출입금지도 하지 않고 사람이 멀쩡히 지나다니는데 훈련을 했다? 처음엔 설마했지만 자세히 보니..